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괜찮아! 지병 하나쯤은

조회수 2021. 2. 14. 12: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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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이 있다고 삶이 끝나는 건 아니다.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직업을 찾을 수도 있고, 더 활기찬 삶을 누릴 수도 있다. 유방암, 우울증, 불안장애, 루푸스 등 결코 가볍지 않은 지병이 있지만, 괜찮은 이들의 이야기.  
우리는 당연한 걸 자주 잊고 산다
편지함을 뒤적이다가 옛 애인의 편지를 발견했다. 시시콜콜한 이야기와 애정이 담긴 글이 이어지다가 한 문장에 눈이 멈췄다. “넌 자신을 너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듯해.” 요지는 너보다 힘든 사람이 많고, 네가 그렇게 힘들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핀잔이 아니라 걱정이었다. 세상의 수많은 걱정이 상대의 자책과 침묵을 만드는 게 문제인 듯하지만. 날짜를 보니 십여 년 전이었다. 분명한 건, 그 편지 때문은 아니었지만 내가 정신과와 심리상담센터를 처음 찾은 해였다. 나는 그 당시 애인에게 내 상태를 뭐라고 설명했을까? 또렷하게 기억하는 건, 그때의 나는 힘든 게 문제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힘든 나 자신이 이해되지 않는 게 문제였다. 말이 좀 이상하긴 하지만 사실이 그랬다. 모든 고통에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이십대 초반까지는. 나는 콤플렉스 덩어리였고, 대체로 우울하고 비관적일 때가 많았다. 그리고 이유를 없애면 고통이 사라질 거라고 믿었다. 상처를 치료하듯 콤플렉스들을 하나씩 지워나갔다. 살을 빼고, 대학교를 편입하고, 내게 헌신하는 사랑스러운 애인을 만나고, 일년에 백 권이 넘는 책을 읽었다. 쉬지 않고 아르바이트를 하며 그럴듯한 옷을 입고 화장을 했다. 사회의 정상성이라는 기준은 모호하지만, 사실 누구나 공감할 만한 암묵적인 기준이 있지 않나? 외모, 몸매, 학력, 직업 등이 적당히 갖춰졌을 때 우리는 ‘너 정도면 괜찮지’라는 말을 하거나 듣곤 한다. ‘너 정도면 괜찮지’라는 말을 듣기 시작한 후 내 고통은 더 짙어졌다. 공황장애 등의 신체적 증상이 나타났고 불안, 불면도 마찬가지였다. 도통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이유 없음’과 ‘나 정도면 힘들면 안 돼’라는 생각은 마음을 빠른 속도로 갉아먹기 시작했다. ‘그럼 이제 뭘 해야 해? 돈이 많아져야 하나?’ 하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돈이 많아진다고 해서 내가 좋아질 거라는 희망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고, 무기력과 자책감이 함께 찾아왔다. 자신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걸 부정하거나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나는 반대였다. 이게 병이 아니라면, 그저 내 기질과 성향이기에 평생 이런 불안과 공포, 허무와 무기력과 싸워야 한다면 사는 건 의미가 없었다. 많은 병원과 상담센터를 들락거리다가 스물여덟의 여름이 되어서야 나와 딱 들어맞는 병명을 찾아냈고(기분부전장애) 절망보다는 후련함을 느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었구나. 이름까지 있는 질환이니까 나아질 수 있겠네?’ 희망이 생겼다. 지금도 상담치료와 약물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완치의 개념도 모르겠고 전문의조차 완벽한 정답을 아는 것 같지는 않다. 3년이라는 시간을 꼬박 투자해서 완치, 극복이라는 단어를 얻지는 못했지만 다른 수확이 있다. 나를 괴롭히는 감정을 나만의 방법으로 다룰 수 있게 됐다. 감정을 다루는 건 중요한 문제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병원을 찾거나 책을 읽을 때 나를 무력하게 했던 건 그들이 제시하는 방법이었다. 그 방법이 너무 진부했기에 힘이 빠졌다. 이를테면 ‘해를 쬐고 운동을 해라’ 같은 것들. 하지만 지금의 생각은 완전히 다르다. 이 진부한 방법들이 감히 나를 살리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다. 어느덧 내가 입버릇처럼 하고 다니는 말은 ‘우리는 당연한 걸 자주 잊고 산다’가 되었다. 당연하고 뻔해서 오히려 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많다. 하지만 우울증에는 이 당연한 행동들이 정말 중요하다. 우리 몸에 세로토닌을 만들고, 몸을 움직이고 땀을 내며 활력을 쌓는 일. 우울감은 수용성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의 내 일상과도 비슷하다. 나는 거의 매일 산책을 하며 해를 쬔다. 그렇게 약간의 땀을 내고는 샤워한다. 그러면 우울감이 조금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 들고, 집 안 곳곳을 청소기로 밀고, 걸레질하고, 빨래를 탁탁 털어서 널고, 반듯하게 개서 가지런히 정리하고 나면 또 활력이 돈다. 억지로 슬픈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펑펑 울기도 한다. 이도 저도 안 될 때는 당연히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지만, 그 무게감에 짓눌리지 않기 위해 손 하나만 까딱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양치하거나, 침구를 정리하거나, 하다못해 머리를 빗고 좋아하는 아이돌의 뮤직비디오를 연속 재생으로 보기도 한다. 나는 잘 살고 싶다. 내게 잘 사는 게 어떤 건지 생각해보면 쾌적한 기분으로 하루를 보내고 편안하게 잠드는 것. 실체 없는 불안과 싸우면서 내면을 무너뜨리지 않는 것. 결국 나를 해하거나 망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하루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침대에서 몸을 털고 일어나 샤워하고, 청소하고, 산책한 뒤 내게 말을 건다. “잘했어.” 손 하나 까딱하면 되는 일들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는 생기가 넘치는 내 친구처럼 작은 것에 기쁨을 느끼고 새로운 것에 도전하며 행복하게 오래 살고 싶다는 말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말을 하게 될 수도 있겠지. 삶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 그래서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망치고 싶지는 않다는 뜻이다. - 백세희(<죽고 싶지만 떡볶이는 먹고 싶어> 저자)  
회복하는 인간
글을 시작하면서 먼저 고백을 한다. 나는 남들 같은 직장에서 평범하게 일하지 못한다. 그것은 내 특성 때문인데 나는 아침에 일어나길 싫어하는 사람, 더하기 정신질환자다. 우울증과 식이장애, 공황장애를 겪고 있는 나는 정신병원에 여섯 번가량 입퇴원했다. 지금 글을 쓰고 있으니, “이제는 다 나았습니다!”라고 외치고 싶어도 그렇지 않다. 여전히 급작스럽게 상태가 나빠지기도 한다. 작년 봄에는 다시 증세가 심해져 응급실만 세 번을 향했다. 언제 다시 상태가 안 좋아질지 모르고, 심해지면 어떠한 일도 못 하기 때문에 평범하게 회사에 들어가도 반드시 퇴사하게 되어 있는 운명이라고 해야 할까. 처음부터 회사 생활을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십대에는 아르바이트를 했고, 스물하나에는 회사에 입사했다. 그렇게 일년쯤 회사를 다니다 프리랜서 계약직으로 다시 출근 생활을 했다.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게 그럭저럭 살았다. 그러나 정신질환은 한순간 나를 망가트렸다. 어느 날부턴지 일어나는 것도, 잠드는 것도 힘들었다. 매일 하는 일이면서 출근하는 순간까지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까마득했다. 일을 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면 반대로 머리가 새하얘졌다. 내 삶은 점점 흑백이 됐다. 매일 하는 일이 무서워지기 시작하니, 사람과 만나는 것도 무서워지고 사람이 무서우니, 집 밖으로 나가는 것도 무서워졌다. 출근할 생각에 숨이 막혀와 밤을 새우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 스트레스로 음식이 입에 들어오면 구역질까지 나기 시작했다. 단순히 몸이 아프다고 생각해 건강검진을 받았다. 큰 병원에서 이십대 초에 건강검진을 받는 사람도 드물었다. 결과는 정상, 또 정상. 이렇게 아픈데 의사는 건강하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화가 났다. 이렇게 아픈데, 아픈 곳이 없다니. 결국, 나는 정신과까지 가서야 그 말을 들었다. “많이 아프시군요.” 그로부터 세 달 뒤,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죽을 것 같아서 병원에 입원하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아 미래가 걱정되는 아이러니함이란. 십대 때부터 꿈꿔오던 직업을 가진 지 겨우 3년이었다. 이제야 제대로 일 좀 하고 있는데 입원을 결정하면서 겨우 잡은 일자리를 놓치고 미래는 까마득하더라. 직장에선 기다려주겠다고 했지만, 입원 한 달, 세 달, 반년, 그리고 일년이 지나가면서 당연하게 나의 빈자리를 다른 누군가 흔적 없이 메웠다. 그렇게 나는 아픈 데다 백수까지 되어버렸다. 그러나 위기를 기회로. 나는 곧 정신병원에서 쓴 글로 책을 출판하며 작가라는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강연도 하고 인터뷰도 하고 글도 썼다. 직업도 마음에 들고 이름도 마음에 드는데 여전히 일을 하려고 하면 공황장애가 심해져 불안하고 숨이 막혔다. 특히 강연을 앞두면 머릿속은 흑과 백을 오가며 손끝까지 아릿했다. 병적인 불안에 늘 비상약을 들고 다닐 정도였다. 괴로워하는 나를 보고 주변에선 강연을 포기하라고 했다. 왜 그렇게 괴로워할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거냐고. 힘든 일을 포기하는 것 또한 자신을 위하는 방법임은 맞다. 하지만 포기를 앞두고 생각했다. 이대로 내가 불안해하는 것을 피한다면 앞으로도 도망치는 인생을 살지 않을까. 이전 직업처럼, 지금의 직업도 같은 이유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저 무기력하고 불안하고 우울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자’ 외엔 표현할 수 없는 사람. 그런 사람으로 남아버리는 것이지 않을까. 그래서 이제 나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 자신으로 남기 위해. 여전히 ‘정신질환자’라는 이름은 나를 따라다닌다. 일주일에 한 번 정신과에 가고 의사는 나를 환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이 나의 전부는 아니다. 두려워하는 일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을 때, 그리고 당당하게 그것을 해냈을 때 나는 환자가 아닌 나로 남는다. 가끔 실패하기도 하지만, 불안과 우울을 이겨냈던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고 쌓여 자신을 믿지 못하던 나에게 말한다. 다음에는 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간다. 두려워도 마주할 수 있는 사람. 아픔에 지면서도 다시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이겨낸 기억을 조금씩이지만, 천천히 쌓아갈 줄 아는 사람. 그것이 스스로 회복하는 인간이 아닐까. 지금 나는 스스로 회복하는 인간을 향해 당신과 함께 걷고 있다. - 이수연(<조금 우울하지만, 보통 사람입니다> 저자)  
살아라 살아내라
예민한 성격의 싱글맘 워킹우먼 7년 차가 되던 해. 몸과 정신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너덜너덜해지다 밥을 먹다가 숟가락을 떨어뜨리는 지경에 이르러 찾은 신경외과에서 섬유근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뚜렷한 원인이 없어 딱히 치료법이 없는 과거에 일명 신병, 혹은 화병이라고 불렸다는 이 요상하고 애매한 병명을 얻은 나는 절박하게 쉼이 필요하다는 선언과 함께 회사를 그만뒀다. 그리고 일년쯤 지나 우연히 가슴에서 콩알만 한 딱딱한 무언가를 만졌다. 불행이 나에게 빙그레 웃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유방암 수술을 했고, 항암을 했다. 그렇게 느닷없이 암환자가 되었다. 삶은 고해이다. 인정하기 불편한 이 사실을 완전히 인정하지 않고는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면 결코 행복을 잡을 수 없다. 왜 나한테 이런 일이라는 생각은 정신을 좀먹는다. 그 물음은 실체도 없거니와 꼬리를 물고 부정의 몸집만 키울 뿐이다. 왜 나면 안 되는가. 삶은 공평하게 불공평하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개소리 같은 말은 졸도할 것 같은 고통 속에서 진실이 되었다. 1차 항암 주사를 맞은 다음 날 아침, 화장실 거울 속엔 파리하고 창백한 낯선 여자가 서 있었다. 불현듯 걷잡을 수 없는 공포가 밀려왔고 울음이 터졌다. 컥컥거리며 숨이 넘어갈 듯 터진 울음은 내 의지로 멈춰지지 않았다. 네 번에 걸친 항암 주사의 주기는 매번 울음 폭발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울음은 훌륭한 회복제였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출하는 시간이 치유의 과정엔 반드시 필요하다. 두려움, 불안, 분노, 억울, 슬픔, 거절감, 무력감, 절망 등 내 안에 엉켜 있던 악에 받친 감정들을 토해내야만 했고 나는 항암 덕분에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어린아이처럼 목놓아 울 수 있었다. 멀쩡하던(물론 아주 멀쩡하진 않았지만) 몸이 항암제 한 방에 속수무책으로 부스러졌다. 암 세포를 죽이기 위해서 점막 세포와 백혈구가 희생된다. 입에서부터 항문까지 이어지는 소화기 전체를 구성하는 점막 세포는 모두 킬이다. 속이 불타오른다. 난소의 기능이 멈추니 당연히 갱년기 증상이 동반되어 밖으로도 기분 나쁘게 열이 오른다. 게다가 불행하게도 투여받은 항암제의 특징적 부작용이 근육통과 신경통이다. 이미 섬유근통의 통증에 지겹게 단련되었지만 뼈가 으스러지는 듯하고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끊어질 것 같은 몸살, 몸 안과 밖이 활활 타오르는 감각은 그동안 미처 알지 못했던 몸의 구석구석에 대해 알려주었다. 그 와중에도 나는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실직 상태임에 기뻤다.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으로 손을 달달 떨면서도 나는 아이를 낳은 이후로 그렇게 마음 편한 적이 없었다. 그제야 생계를 책임져야 한다는 이유로 나를 혹사시킨 불안에서 해방되었다. 내가 살아온 길을 3자가 되어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시간은 죽음과 같은 통증 앞에서야 가능했다. 모래처럼 빠져나가버릴 것들을 손에 쥐느라 미련하게 안간힘을 쓰고 있는 나를 위로했고 용서했다. 내 아이에 대한 걱정보다 아픈 자식을 거두는 엄마의 찢기는 마음을 온몸으로 체험했다. 아프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진정 나를 살렸다.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기에 나는 아플 때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자기 연민임을 안다. 통증보다 자기 연민이 정신을 나락으로 이끈다. 자기 연민은 숭숭 빠져버리는 머리카락 앞에서 스멀스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를 쓸어 넘길 때 힘없이 빠지는 한 움큼의 머리카락이 무섭도록 생경했다. 며칠을 우울 속에서 허우적댔다. 하지만 우울할 여유조차 없이 두피는 푸석하게 마르고 껍질이 벗겨지더니 모낭염이 돋아나며 진물이 났다. 누군가 내 머리카락을 통째로 쥐고 잡아 뽑는 것처럼 욱신거려 두피를 뜯어내고 싶었다. 가려움과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머리카락을 다 밀어버렸다. 민머리의 나는 울면서 정원을 산책하다 뉘엿뉘엿 넘어가는 해를 바라보며 그동안 미처 내가 생각지 못했던, 값없이 주어진 소소한 것들에 대해 감사했다. “난 머리숱이 참 많았지, 단단한 손톱이 있어 단추를 채울 수 있었네, 그동안 편안하게 물을 마실 수 있었던 게 기적이었어, 지긋지긋한 생리 덕분에 피부가 늙지 않았던 거군. 항암이 네 번이라 다행이다. 차라리 내가 아파서 감사하다.” 나약함을 인정하니 순전한 감사가 나온다. 내가 긍정적인 사람이라서 이런 마음가짐이 가능했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나는 알아주는 비관주의적 ‘불평러’였다. 마음이 힘들면 몸이 아프고 몸이 아프면 마음이 병약해지기 마련이다. 지속적인 몸의 통증은 절망과 낙담으로 이어진다. 주변의 괜찮냐는 걱정이 짜증나고 괜찮을 거라는 위로조차 불편하다면 한계에 이른 거다. 이 즈음이면 긍정과 낙천은 충분하지 않다. 3개월간 항암으로 온몸에 두드러기가 일어나고 면역 체계의 고장으로 혈관 부종이 생겨 장기와 손가락이 부어올라 가렵고 숨이 막히고 손발이 잘려나가는 것 같은 온갖 통증을 맛보았다. 이토록 섬세하게, 개성 있게 생생한 통증이 있다는 사실이 놀라울 정도였다. 항암산을 오르며 나는 변해 있었다. 나를 내려놓는 법을 배웠고 내 열심이 아닌 다른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온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성장은 혹독한 시련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결국 인정했다. 죽음을 향해 달리는 고난 앞에서 나는 ‘삶의 의지’를 보았다. 삶 안에는 슬픔도, 울음도, 자기 연민도 우울도 있다. 그 감정들을 껴안고 뒹굴며 자신의 삶을 진정으로 사랑하기를 작정하는 거다. 거저 주어진 삶이므로 그렇게 살아내는 거다. 살아냄은 아름답게 피어오르고 눈부시게 빛난다. ‘아침 해가 떠오른다 일어나라. 새 아침이 너를 반긴다. 이제 일어나라. 어제의 슬픔은 어제로 족하니 살아라. 너의 새 하루를. 너를 둘러싸는 세상이 네 마음 같지 않더냐 고단하더냐. 그래 그만 일어나라. 저 구름 너머로 감춰진 하늘을 보아라. 너를 기다린다. 일어나라 일어나 가라. 너를 기다리는 그곳으로. 네가 있어야 할 그 자리를 지키고 살아라 살아내라. 저마다의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라 살아내라. 살아내고 살아내다 불현듯한 그 시간을 마주하기를 나는 소망한다. 여전히 내 앞에 할 일이 너무 많아 아쉬울 그 시간을 살아라 살아내라.’ 나무엔의 ‘살아라 살아내라’의 가사처럼. - 남지현(<아 요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토닥토닥 마음을 달래고 내 몸도 달래며
대학을 졸업하고 나니 맘처럼 되는 일이 없었다. 10을 노력하면 10 혹은 운 좋으면 11을 얻을 수 있던 학생 때와 달리, 사회에서는 10을 노력해도 1도 주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리고 나의 사회 초년기는 좀 거칠기도 했다. 열정 페이, 부당한 비정규직, 회사의 파산 그리고 몸담았던 잡지의 폐간 등. 워낙 어릴 때부터 잔병이 많은 체질인 데다 맘 고생이 더해지면서 각종 염증 질환을 달고 살았던 20대. 그래도 그럭저럭 잘 지내는 줄 알았다. 그 후로 결혼도 하고 직장 생활도 꾸준히 이어가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간 쌓인 그리고 개인사로 인한 스트레스가 뭉쳐 가슴에 돌덩어리가 박힌 듯 답답한 느낌이 지속됐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지고, 몸이 여기저기 아팠다. 이상하게 가방만 들어도 살이 아려왔다. 목, 어깨, 무릎, 발목, 손가락까지 관절에 저릿저릿 말못할 통증이 느껴졌고, 손발 끝엔 빨갛게 염증이 돋았다. 피부과, 이비인후과, 정형외과, 한의원 등 안 가본 곳이 없는데 의사들은 모두 ‘잘 모르겠다.’ 혹은 ‘괜찮은데요?’라는 식이었다. 양치기 소년이 된 것 같았다. 실제론 점점 증상이 심해져 걷기도 힘들어졌다. 그런데도 병원에 가면 아무 이상이 없다고 했다. 원인을 스스로 찾아낼 수밖에 없었다. 신경이 곤두설 만큼 아프고, 힘이 없어 물병 뚜껑조차 열기 힘든데, 모두 내가 안 아프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회사 옆 부서 편집장님이 류마티스 관절염 때문에 퇴사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 그건 나이가 많은 어르신들의 병인 줄 알았는데?’ 나도 관절이 아프니 혹시 류마티스일까 싶어 가까운 류마티스 내과를 찾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류마티스 내과라는 것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곳에서 소견서를 받았고, 대학병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루푸스라는 희귀병을 진단받았다. 그날엔 휠체어를 타야 할 정도로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 아픔을 부정당하는 고통 속에 살다 그런 진단을 받으니 처음엔 충격이라기보다 속이 시원했다. 병원에서는 일단 푹 쉬고, 약 잘 먹고, 햇빛을 잘 피하라고 했다. 자외선이 이 병을 악화시키는 요인이라고 하면서. 조금만 햇빛을 쐬도 금세 피부가 달아오르고, 그 밤엔 몸살 기운이 있었던 이상했던 나를, 내 몸을 그제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달의 휴식 끝에 복직했지만, 그걸로 달래지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퇴사를 했고, 정말 의사 말처럼 푹 쉬는 생활에 돌입했다. 실제론 휴식이라기보다 루푸스와의 외롭고 치열한 사투였지만. 루푸스 치료제는 아직 세상에 없다. 증상에 따라 스테로이드의 양을 조절하며 병을 누르는 게 전부. 내 속의 루푸스도 희귀난치병답게 쉽게 고개 숙이지 않았다. 하루에 8알의 스테로이드를 복용하고 나서야 서서히 그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그 많은 약을 먹는 동안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풍선처럼 부어오르는 얼굴, 홍반, 탈모, 공황장애 등 피부가 얇아져 샤워 타월도 가시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수저도 들지 못할 정도로 힘이 없어 나무 수저와 아기들이 사용하는 그릇을 사용했다. 깨어 있는 상태가 너무 괴로워 독한 정신과 약을 먹고 8시면 잠들었다. 그렇게 몇 달을 보내고 나서야 조금씩 몸이 돌아온다는 걸 느꼈다. 정신과 약의 효과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긍정적인 생각이 솟구치기도 했다. 이번만 견디면 모든 게 나을 것 같은 희망이 차올랐다. ‘왜 나만 이래? 내가 뭘 잘못했길래?’라는 생각을 버리고 ‘나는 이것도 잘 이겨낼 수 있어’라고 스스로 주문을 걸었다. 여기에 남편의 보살핌과 반려견의 맹목적 사랑이 더해지니 눈에 띄게 증상이 호전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회사 생활이 그리워졌다. 조심스레 다시 시작한 일, 물론 고비도 있었다. 남들보다 스트레스에 취약하고 약한 탓에 가끔 몸을 사려야만 했지만 벌써 햇수로 5년째 큰 문제 없이 회사 생활 중이고, 그사이 토끼 같은 딸도 낳았다. 루푸스 환자는 여성 호르몬의 영향을 많이 받기에 출산 후가 고비인데, 이도 비교적 짧게 잘 견뎌냈다. 그리고 지금은 이 시대의 슈퍼우먼, 워킹맘이 되었다. 체력적으로는 병을 얻기 전보다 지금이 더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달라졌다. 이제는 어느 정도 털어내는 힘을 터득한 사람이 되었으니.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는 집에 가는 길에 버려야 한다. 그리고 남들의 시선이나 무심코 던진 말에 휘둘리지 않아야 한다. “야, 너 그렇게 챙겨 먹으면 진짜 오래 살겠다.” “이 정도 햇빛은 괜찮지 않아?” 등 좀 유별난 내 행동을 보면 몇몇 동료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처음엔 상처받았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다. 나에게 상처를 주고 싶은 게 아니라, 잘 몰라서 던진 말일 뿐이니까. 몸과 마음은 놀랍도록 견고하게 이어져 있다. 마음이 힘들어 더 버티지 못하겠다고 느끼는 순간 몸이 고장 나기 시작했고, 마음에 빛이 들자 몸이 조금씩 풀어졌다. 나는 아직 정기적으로 피검사를 하고, 매일 약을 먹는다. 지금의 목표는 약을 점차 줄여 끊는 것. 스테로이드는 단기적으로는 휠체어 탄 사람도 뛰게 하는 마법을 부리지만, 장기 복용 시엔 몸을 좀먹어 무시무시한 부작용을 낳는다. “지금 아니면 못 끊어요. 힘들더라도 약을 안 먹는 날을 늘려보세요. 다 익숙해집니다. 지금까지 잘해오셨잖아요.” 직전 진료에서 담당 의사가 한 말이다. 그의 조언처럼 요즘은 기력이 달려도 약을 안 먹어보려 노력 중이다. 이 또한 이겨낼 수 있을 거다. 내 마음만 무너지지 않는다면. - 이정혜(<얼루어> 뷰티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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