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 건 8할이 아이돌이다

조회수 2021. 8. 31. 12:1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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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어른이 된다는 건 라자냐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1999년에 발매된 S.E.S. 3집 앨범에 ‘바람둥이 길들이기’라는 노래가 있다. ‘스파게티, 아이스티, 라자냐 그게 다냐?’라는 가사가 나오는데, 바람둥이 애인이 친구 다섯 명을 만나 식사를 했는데 영수증에 스파게티, 아이스티, 라자냐만 있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는 내용이다.  
돈가스를 레스토랑에서도 팔던 시절, 라자냐가 뭔지 몰랐던 나는 남자가 바람을 피웠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라자냐가 찜닭이나 탕수육처럼 여럿이 먹는 음식일 수도 있으니까. 어른이 되어 두부 반 모만 한 라자냐를 먹고 아쉬움에 입맛을 다셔본 뒤에야 알게 됐다.  
‘아. 그놈은 정말 바람을 피웠구나.’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현재 나는 종종 라자냐를 집에서 만들어 먹는다.

아이돌은 꿈과 희망이다

아이돌은 나에게 ‘프라이드’가 뭔지도 알려줬다. H.O.T. 4집에 ‘Korean Pride’라는 노래가 있다. 중학교에 올라가서 알파벳을 배운 세대인 나는 당시 ‘pride’가 무슨 뜻인지 몰랐다. 모르는 단어를 곧바로 찾아볼 수 있는 스마트폰이 출시되기 10년 전, 초고속 인터넷이 보편화되기 2년 전의 일이다.  
아무튼, 그 전날 발매된 따끈따끈한 새 앨범을 가지고 등교해 하루 종일 가사집만 뜯어보다 영어 시간에 선생님께 pride가 무슨 뜻인지 여쭤봤다. 그리고 “너 지금 내가 프라이드 타고 다닌다고 놀리는 거야?”라는 예상 밖의 대답을 들었다. 선생님의 차는 중고 프라이드였다. 사실 나는 프라이드가 어떤 차인지도 몰랐다. 내가 아는 건 아빠 차, 고모 차, 교회 차밖에 없었다. 지금은 고급 외제 차도 잘 안다. 팬픽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출처: 방탄소년단 공식 홈페이지

학창 시절, 내게 아이돌은 크리스마스와 생일마다 선물을 보내주는 호주에 사는 이모 같은 존재였다. 비록 우리 이모들은 다 남양주시에 사시지만. 아이돌은 나에게 라자냐와 프라이드를 알려주었고 서울에서 혼자 지하철 타는 법을 알려주었으며 홈페이지 만드는 법과 포토샵 활용법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팬픽계의 뗀석기라고 할 수 있는 ‘쿨워터’ 향수와 마호가니 원목 책상이 뭔지도 알려주었다.  
참고로 요즘에는 쿨워터 대신 ‘조 말론 런던’ 향수가, 마호가니 대신 ‘월넛’ 목재가 주로 쓰이는 것 같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향기나 목재 같은 섬세한 배경 묘사는 많이 줄어든 것으로 안다.
 스마트폰의 상용화 이후, 카카오톡과 SNS로 하루 종일 메시지를 주고받는 독자층은 문장의 아름다움과 완성도에 집중한 지문 위주 글보다는 대사의 재미가 살아 있고 설정에 대한 설명이 명확한 속도감 있는 스토리를 더 선호하기 때문이다.

2019년 방탄소년단 월드투어 현장 (출처: 빅히트)

아이돌은 내게 꿈과 희망이었다. 1997년에 발매된 2집 <늑대와 양> 뮤직비디오에서 야자수가 즐비한 LA의 대로를 달리는 오픈 스포츠카에, 범칙금을 5000달러쯤 내야 할 것처럼 위험하게 양팔을 벌리고 앉아 자유와 태양을 껴안는 H.O.T. 멤버들을 보며 나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도시를 꿈꿨다.  
또 2002년 열일곱 살의 보아가 오리콘 차트 1위를 하고 도쿄 시부야에서 <한밤의 TV연예>(2016년 종영)에서 진행한 길거리 인터뷰에 응하는 보며 가슴에 무언가가 꿈틀대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H.O.T. 2집 <늑대와 양> 뮤직비디오 캡처

당시 우리 또래 아이들의 장래 희망은 태반이 보아였다. 용기 있게 도전하고 성공을 쟁취하는 사람. 곧장 친구들과 일본어 자격증 책을 샀다. 그리고 늘 그렇듯 첫 단원만 열심히 공부하고 덮었다. 당시 팔린 일본어 수험 대비 서적들은 보아에게 10% 정도는 로열티로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나는 LA에서 야자수를 질리도록 보며 1년 동안의 유급 인턴십 과정을 마쳤고, 생활에 도움은 하나도 안 되지만 만일 일본에서 우주선이나 로봇 같은 걸 타고 싸우게 된다면 상대방의 기선을 제압할 수 있을 만한 애니메이션 일본어는 대충 아는 어른이 되었다.

혼자서 어른이 된 사람들의 친구 아이돌

아이돌이 늘 좋은 것만 알려준 것은 아니다. 2001년 신화 4집 컴백 음악 방송을 보기 위해 줄을 서 있다가 대열을 흐트러뜨렸다며 난데없이 경호업체 직원에게 멱살을 잡혀 끌려 나간 적이 있다. 지금까지 살면서 누군가에게 멱살잡이를 당한 건 그때가 유일하다.  
나는 아직도 실장인가 뭔가로 불리던 남자의 소름 끼치도록 억센 손과 “나가세요. 나가세요.”라고 이를 짓씹으며 내던 낮은 목소리를 기억한다. 항의하지 못했다. 무서웠으니까. 조용히 입 다물고 있으면 다시 줄을 서게 해줄지도 모르니까. 물론 거기까지 가서 빈손으로 돌아갈 마음이 전혀 없던 나는 슬그머니 제자리로 돌아가 컴백 무대 관람에 성공했다.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내내 떨어야 했지만 말이다. 용기를 낸 덕분에 의자를 이용한 안무로 K-POP 퍼포먼스의 전설이 된 ‘Wild Eyes’ 무대를 코앞에서 볼 수 있었다. 무려 컴백 특별 버전으로.

출처: 신화 공식 홈페이지

이후로 오랫동안 궁금했다. 시간과 돈을 들여 방송국에 와서 질서에 맞춰 입장할 차례를 기다리던 열여섯 살 중학생을, 자기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끌어내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비슷한 맥락의 일은 종종 발생했다. 별 이유 없이 팬에게 욕설을 퍼붓는 로드매니저도 봤고, 내 돈 주고 간 공연에서 시작이 한 시간쯤 지연돼도 사과 한마디 받지 못하는 일도 흔했다. 아이돌 팬에 대한 무시와 하대를 가장 극명하게 체험한 곳은 “네가 지금 아이돌 좋아할 때야?”를 누가 누가 더 영혼을 담아 말 하는지 겨루는 경연장 같던 명절 큰아버지 댁이 아니라 그들이 지탱하고 있는 K-POP 업계였다. 그것이 내가 체험한 최초의 부조리였던 것 같다.

출처: Unsplash

요즘에는 이런 일이 많지 않을 것이다. 음악 방송은 사전에 조율한 인원을 각 기획사가 직접 선착순으로 신청받고, 현장은 ‘임원 언니들’이 아니라 ‘팬 매니저’가 통솔하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시절 임원 언니들은 기획사 직원이 아닌데도 현장 관리도 하고 공식 팬클럽 우비와 응원봉이 든 보따리를 들고 다니며 팬클럽 입금증을 확인하고 배부하는 일도 했다.  
아무튼, 여기에 팬들은 자신이 기획사의 ‘고객’이라는 명확한 인지와 팬덤에 대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현장 진행에 협조한다. 만일 20년 전 같은 일이 재발한다면, 팬덤 전체가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설 것이다. MZ세대가 주도하는 요즘의 팬덤은 뛰어난 커뮤니케이션 능력과 유능함,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행동한다. 덕질도 예외는 아니다.

출처: 방탄소년단 페이스북

예를 들어, 2014년 ‘상남자’로 인기를 끌었던 방탄소년단의 가사에는 이제 성별을 지칭하는 단어가 없다. ‘여자는 최고의 선물이야.’ 등 성적 대상화 가사가 담긴 ‘호르몬 전쟁’(2014)은 콘서트 세트리스트에서 퇴출됐다. 일본 우익 성향 프로듀서와의 협업은 제작이 다 끝난 상태에서 팬들의 문제 제기로 백지화되었다.  
방탄소년단은 팬들의 비판을 성실하게 수용해 문제의식을 자부심으로 바꿔주었다. 예전에 내게 아이돌만이 꿈과 희망이었다면, 이제는 팬덤에서도 꿈과 희망을 발견한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아니 아이돌과 함께 어른이 되었다.

덕후와 방탄소년단 지민 인형의 겨울 (사진제공: 최이삭)

나를 키운 건 8할이 아이돌이다. IMF 외환 위기로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웠던 가정의 둘째 딸에게,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고 학교 가는 걸 괴로워했던 외톨이에게, 놀이터 하나 없고 도시가스도 들어오지 않는 고립된 시골 마을에 살던 소녀에게 아이돌은 더 넓은 세상을 보여주는 창이었고, 두려움 없이 사랑을 퍼부어도 되는 친구였으며, 맨땅을 박차고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갈 수 있게 하는 용기이자 희망이었다. 그렇게 나는 혼자서, 아니 아이돌과 함께 어른이 되었다.  
글/ 최이삭

출처: http://www.bigissue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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