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길에서 만나는 고양이처럼 살다

조회수 2021. 2. 13. 14: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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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일현에게

안녕. 요즘 유난히 잘 지내느냐는 인사를 자주 듣는 것 같아. 가벼운 대답이 두려운 내게 쉬운 물음은 아니지만, 아마도 다들 같은 마음이라 그럴 테지. 오랜만이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오늘날 우리는 단 몇 초 만에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고, 때로는 연락 빈도가 관계의 온도처럼 여겨질지라도. 만약 우리가 먼 옛날에 살았더라면 서신이 오가는 동안의 침묵을 어색해하지 않고도 서로를 생각했겠지. 집배원에게 총총걸음을 부탁할 수는 있겠지만.


우리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다양한 걸음을 함께해온 것 같아. 목적지를 향한 잰걸음, 샛길로 새는 거북이걸음, 갈지자를 그리다가 치는 네발걸음, 제자리걸음이나 헛걸음조차 즐거웠지. 때마침, 일현이 근처에 산책로가 있는 집으로 이사했다는 소식을 이제야 들었고, 같이 또 걷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


날씨 이야기는 생략할게, 무엇보다 안부가 궁금했어

-나란히 느긋하게 걸으며 얘기하니까 좋다. 산책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보통 산책 하면 ‘어느 정도 시간을 들여 천천히 걷는 것’이라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내게 산책이란 ‘바람 쐬고 싶을 때 잠깐 혹은 짧은 거리라도 걷는 것’이고, 무척 중요한 행위야. 대부분의 걸음은 목적지가 있잖아. 나는 발길 닿는 대로 걷는 것이 좋은데, 생각보다 일상에서 누리기가 어렵더라고. 걸을 때 내 마음가짐이 산책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 같아. 

요즘 재택근무를 많이 해서 며칠 동안 아예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날들이 있는데, 가끔은 무척 답답해. 워낙 바빠서 산책을 자주 하지는 못하지만, 집 근처에 산책로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참 좋아.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내려가 한 번씩 걷다 올 수 있으니까. 또 산책로가 놓인 산에 고양이들이 많이 사는 것 같아. 고양이를 보면 기분이 좋잖아. 가끔은 고양이가 보고 싶어서 산책할 때도 있어.(웃음)

- 우리가 연합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일현은 선배이자 부장이었지. 스무 살이던 나는 미처 알지 못했어. 늘 듬직했던 일현이 그때 얼마나 책임감을 느꼈을지를.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바빴어. 그건 아마도 늘 어떤 자리를 맡았기 때문인 것 같아. 학창 시절, 해마다 임원을 맡았어.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여러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건 더 재밌는 경험을 위한 것이니까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진심을 다해 노력하면 그 마음이 닿았고, 멋진 인연과 결과물 등으로 이어졌어. 

그 보람은 대체 불가능하더라. 바쁘지 않으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조바심에 시달리던 시기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아. 나에 대해 점점 더 많이 알아가고 알게 된 내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며 나를 갉아먹는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해. 나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것, 참 멋진 일이지 않니?

특별한 용건이 있어 찾아온 건 아니야

-방 창문 밖에 바로 굽이진 산등성이가 보이고 새소리도 이따금 들리니 마음이 편안하다.


=꿈꾸던 나만의 집! 이런 게 없다가 최근에 생겼어. 비싸고 좋은 집을 사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집 안에 정원이 있었으면 좋겠어. 자연을 느낄 수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확실해진 거지. 또 유럽을 여행하면서 느낀 건데 테라스 문화가 참 좋더라. 테라스에서 일광욕을 하거나 차를 마신다든지. 집이 실용성을 떠나 내가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곳이면 좋겠어.

-김한민 선생님의 책(<페소아>, 김한민 지음, arte 펴냄)을 읽다가 알게 된 사실인데, 포르투갈에는 ‘창문하다(janelar)’라는 동사가 있대. 창문을 매개로 바깥세상을 만나며 사색하는 사람이 유난히 많기 때문’이라고 하더라. 자연이 있고, 창문하기 같은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을 찾는다면 다음 걸음을 내딛고 싶을까?


=다음이라면, 아마도 내가 결혼이나 독립을 할 때일 텐데… 지금은 가족과 살고 있는 현 상태가 좋아. 한평생을 살면서 지금처럼 가족과 함께 살 수 있는 시기가 생각보다 무척 짧은 것 같아. 그래서 당장은 다음 공간을 찾아 움직여야겠다는 욕심은 없어.

-일현이 이 집으로 이사 오고 나서 처음 만나는데, 더 안정적이고 여유로워진 것 같아.


=창밖이 온통 푸르름으로 가득했으니 지난여름 무렵이었던 것 같아, 막 이사 왔을 때 울컥했어. 원래 살던 곳은 임시 거처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서울에서 처음으로 이곳이 ‘집’처럼 느껴졌거든. 며칠 전에는 눈이 아주 많이 왔잖아. 창문을 열었는데 아이들 웃는 소리가 들리고, 눈사람을 만드는 사람들이 보이는 거야. 그 상황이 퍽 재밌었고, 사람 사는 곳 같다는 느낌이 들었어. 더불어 자연을 많이 느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니 만족도가 높아. 

 내 방은 내가 꿈꾸는 것과 괴리가 조금 있어. 굉장히 실용적으로 꾸며져 있거든.(웃음) 하지만 그 안에서 포근함을 찾으려고 해. 가구나 소품의 위치를 내 동선에 맞추면서 꾸며가고 있어. 무드등을 선물 받았는데, 밤에 휴대폰 볼 때 켜놓으니 좋아서 침대 머리맡에 두었고, 선인장과 커피나무를 키우고 있어. 참, 방이 추워서 침대에 텐트를 설치했는데 따뜻해서 좋더라. 누가 내 방에 들어와도 내가 안에서 무얼 하는지 보이지 않는 것도 장점이야.(웃음)

- 지금 하는 일은 어때?


=이전에 다니던 회사에서는 내가 직접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어. 너무나 보람찬 일이지만, 한편으로는 나를 많이 소진하는 것 같기도 했어. 지금 회사에서는 지역 아동 센터에 모이는 아이들에게 좋은 멘토를 찾아 이어주는 일을 하고 있어. 

기업에서 사업비를 따서 지역별로 센터를 선정하고 대학생 멘토를 선발해 아이들과 이어주는, 그러니까 각 주체를 연결하는 거야. 이렇게 교육의 선순환과 생태계를 만드는 일에 관심이 있는 건 확실해.

-과외 같은 걸 해보고 싶어도 한 아이의 중요한 시기를 함께하는 데 나는 충분히 준비된 사람인가 싶어서 못했어. 그래서 일현이 굉장히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대할 때 마음을 어떻게 써?


=내가 키우는 선인장을 대할 때와 같은 맥락일 거야. 매일 선인장을 생각하지만, 이 식물에 물이 꼭 필요할 때만 물을 주는 것처럼. 아이들이 편하다고 느끼게 하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무관심하게 보이는 관심이 필요한 것 같아. 이 방식이 더 어렵지만 아이들을 존중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우리가 어른으로서 어린이를, 다음 세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얼까?


= 얼마 전 <유 퀴즈 온 더 블럭>을 봤어. “신이 자기를 만들 때 어떤 것을 주지 않은 것 같아요?” 하고 한 아이에게 물었는데, 아이가 “신께서는 저한테 남김없이 전부 다 주신 것 같아요”라고 답하는 모습이 담긴 영상이었지. 과연 우리가 성인이 된 이후에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을까? 세상이 따뜻해지려면 우리 어른들이 아이들을 많이 배우고 아이들의 태도를 살피며 아이들이 어떤 말을 할 때 그것이 어떤 생각에서 비롯됐는지 고민하고, 아이들이 그 생각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지 싶어.

추신

지금껏 나는 항상 일현을 총총걸음으로 쫓아다녔지. 이제는 나도 누군가에게 일현 같은 존재가 되고 싶어. 좋아하는 책 에서 ‘산책이란 우아한 헛걸음’이라고 하던데. 내 헛걸음을 늘 우아하게 만들어줘서 고마워, 늘 내게 발맞춰 걸어준 것도. 그럼 이만 총총.


글/ 조은식, 사진/ 이규연

출처: http://www.bigissue2.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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