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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의 비밀]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에 담긴 소름돋는 비밀

조회수 2021. 2. 20. 18:5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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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아니면 죽음?

꼭 맞잡은 두 손

엄숙한 표정

화면 꽉차게 서 있는 두사람


15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회화로 꼽히는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입니다.


섬세한 표현의 정수를 보여준 이 작품은

얀 반 에이크가 그린 걸작으로 손꼽히죠.


그런데 이 작품 앞에서

유독 기이함을 느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미스테리한 분위기에

위아래로 늘여놓은 듯한 인물의 모습까지.


수백년이 지났지만

이 그림은 여전히 

다양한 소문을 몰고 다닙니다.


사람들은 이 작품에

수많은 패러디를 만들어내고,

그림 속 남자를

화려한 옷을 입은 푸틴이라 부르기도 하죠


섬세함으로 유명한 이 그림에서

사람들은 왜 기이함을 느끼는 걸까요?



먼저 그림을 한 발짝 

떨어져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뭘 하고 있는 것 같나요?



침실,

맹세를 하고 있는 듯한 포즈,

마지막으로 두 사람이 

꼭 붙잡고 있는 손까지.


두 사람 사이에 은밀한 서약이

이뤄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많은 사람들은 이들이

결혼을 하는 모습일것이라 유추하죠.


실제로 이 그림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결혼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가까이에서 찬찬히 살펴보면

이 그림은 더 특별해지는데요.


두 사람의 신발은 벗겨져있습니다.

정중앙의 벽에는 글귀가 새겨져있죠.


평범한 결혼식 장면을 그렸다기에는

의미심장해 보이는데요.


실제로 그림이 그려진 15세기는

그림에 상징을 넣는 것이 

유행하던 시기였습니다


이전까지 성행했던 종교화에서는

물건이나 상황 속에 

종교적인 의미를 숨겨뒀었는데요.


아이를 끌어안고 있는 젊은 

여인은 성모마리아를

검은 염소는 죄와 악을 의미했죠.


르네상스 시대로 넘어오면서

화가들은 신이 아닌 

현실을 그린 그림에도

나름의 의미들을 넣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종교화와 세속화를 모두 

작업했던 얀 반 에이크에게

이런 기법은 어렵지 않았을 텐데요



덕분에 우리는 그의 그림 속에서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의미를 찾아낼 수 있죠.


사실 아르놀피니 부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아르놀피니가 브뤼헤에서 

일하던 이탈리아 상인이라는 

정도만 알 수 있는데요.


15세기 초, 브뤼헤는

번성하던 경제도시였습니다.


얀 반 에이크가 그림 속에 숨겨놓은

퍼즐조각 중 하나는 바로 

아르놀피니의 ‘부유함’이죠.


당시의 침실은

지금처럼 은밀한 

개인공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방문객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는데요.


자신을 드러내고 과시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죠.


그들이 입은 옷을 살펴보면

이를 더 잘 느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섬세하고 화려한 

모피코트를 입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문 밖을 보면 

붉은 열매들이 열려있는데요.


열매가 맺힐 정도로 

따뜻한 날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가진 옷 중 가장 좋은 

겨울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죠.


사람들은 여인의 배가 불룩한 것을 보고

임신한 것이라 추측하기도 하는데요.


그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이 둥근 배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 아니라


옷을 감싸안고 있습니다.


사실 이는 당시에 유행하던 

복장이었습니다.


여성들은 비싼 천으로 만든 

드레스를 아주 길게 만들어 

손으로 부여매고 다녔는데요.


이는 자신의 부유함을 

드러낼 수 있는 옷이기도 했죠.


이 뿐만이 아닙니다.

창가 아랫쪽에는 오렌지가 놓여있는데요.


당시 브뤼헤에서 오렌지는

 아주 귀한 과일이었습니다.


수입해야 구할 수 있었던 값비싼 과일이

창틀과 서랍 위를 굴러다니고 있죠.


창문 위의 스테인드 글라스와,

바닥에 깔려있는 카펫도 마찬가지입니다.


화려한 문양의 카펫은 

흔히 구할 수 없는 것이었고,

스테인드글라스를 자신의 집 

창문에 넣을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죠.


아마 아르놀피니 부부는

그 지역을 주름잡는 부자였을 겁니다.


질감 표현을 중시했던 얀 반 에이크는

고급 모피의 털부터, 

드레스의 미세한 절개선까지 그려냈는데요.


그의 섬세한 표현방식은

곳곳의 부유함을 그려내기에 아주 적합했죠.


그러나 그가 새겨넣은 것은

 ‘부유함’만이 아니었습니다.



두 부부는 침실에서 

신발을 벗고 있습니다.


남자의 나막신은 남자의 발 옆에

여자의 붉은 신발은 뒷편의 

붉은 소파 앞에 있는데요.


유럽사회는 실내에서 신발을 

벗는 문화가 아니었습니다.


신발을 벗는다는 것은 

신성한 공간에 있음을 의미하죠.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마리의 개가 정면을 향해 서 있습니다.

개는 신뢰와 충실함을 상징하죠.


개를 확대해서 보면

얀 반 에이크가 얼마나 섬세한 

화가인지를 알 수 있는데요.


그는 거의 털 한 올 한 올을 

모두 그려냈습니다.


그림의 어느 한 부분도 

의미없이 그리지 않았다는 걸

유추할 수 있는 구간이기도 하죠.


여인의 머리 근처에는

용을 밟고 서 있는 조각상이 있는데요.


출산의 수호신인 

성녀 마르가리타입니다.


두 사람이 부부인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이죠.


또한 두 사람 사이의 샹들리에에는

단 한 개의 초만 켜져있습니다.


기독교 사회였던 당시에

단 하나의 촛불은 

신의 눈을 의미했습니다.


즉, 지금 이 순간은

신의 가호 아래 이루어진

성스러운 서약이라는 의미인데요.


그 서약에 증인으로

 선 사람이 있습니다.


샹들리에 아래에 있는 

거울을 보면 알 수 있죠.


거울은 두 가지 역할을 합니다.


첫 번째로 거울은 뒤에서 

보는 시선을 보여주면서

순식간에 이 공간이 현실에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죠.


이 거울이 없었다면 그저 두 부부가

서약을 하는 평면적인 그림이었을 겁니다.


두 번째로 거울은 그림 속에는

 나오지 않았던 두 사람이

이 공간 안에 더 있었음을 알려줍니다.


바로 그 두 사람이 이 서약의 증인이 되죠.


거울 위에는 문구가 새겨져있습니다.


“얀 반 에이크가 여기에 있었다”


화가는 자신이 그 공간에 있었음을

직접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화가의 자부심이 

느껴지는 동시에 이 서약에 

증인으로 왔다는 걸 보여주죠.


자세히 보면 얀 반 에이크 옆에

또 한 명의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습니다.


그의 조수일수도 있고,

지금 이 순간 저 부부를 

지켜보고 있을 당신을

그린 것일 수도 있죠.


덕분에 이 부부는

가장 많은 하객을 가진 

부부라 불리기도 합니다.


털 하나까지 표현한 사실적인 묘사에,

평범한 그림을 현실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거울까지.


이 그림은 진짜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요소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그러나 사진을 보는 것 같은 현실감 대신

왠지 모를 기이함이 느껴지는데요.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다른 작품들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14세기 이후

딱딱한 표현 양식을 가진 

종교화의 시대가 끝나고

인간 중심의 르네상스가 도래했습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지역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나타났죠.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과학적인 접근을 중시했습니다.


실제로 인간의 눈에 물체가 

어떻게 보여지는가를 연구해

정확한 구도의 그림을 그려내려고 애썼죠.


이 시기 이탈리아의 그림들은

사람과 공간 모두 정확한 비례와 

구도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북쪽으로 넘어가면서 

방향이 조금 달라졌는데요.


그들은 과학적 완결성보다

현실에 최대한 가까운 

치밀한 묘사에 더 집중했습니다.



때문에 어떻게 빛을 

써야 더 진짜 같을지,

어떻게 하면 현실의 질감을 그림에 

그대로 표현할지에 집중했죠.


얀 반 에이크는

빛을 잘 쓴 화가로도 불리는데요.


창문으로부터 쏟아져 내려와

그들의 얼굴을 지나

뒷편의 유리묵주,


심지어 개의 눈동자에까지 저민 빛을 보면

그가 빛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죠.


빛을 잘 표현해내기 위해선

색을 잘 쓸 줄 알아야하는데요.

빛에 비친 은은한 피부 광채나

창문 옆에 빛을 받고 

있는 쨍한 오렌지의 색감들을

구현해낼 수 있어야 했죠.


세밀한 표현에 열광했던 얀 반 에이크는

기존에 계란을 섞어쓰는 

템페라화와는 달리 기름을 이용해

더 풍부한 색감을 낼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유화의 시초가 되었죠.


그는 유화 물감을

아주 얇게 여러번으로 칠해서

각각의 겹이 투명하게 보이도록했습니다.


한 겹 위에 또 한 겹 칠하면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깊고 

풍부한 색채감을 만들어낸 거죠.


그는 여인이 쓰고 있는 

레이스의 빳빳한 질감


남자가 벗어 놓은 나막신 

뒷꿈치의 나무 질감까지 표현해냈습니다.


이 수많은 물건과 상징들을

그림 속에 모두 그려내기 위해

원근법에 집착하지는 않았는데요.


사실 아르놀피니 부부의 그림은

과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습니다.


한 사람의 시선에는 

하나의 소실점이 있습니다.


오솔길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

땅과 나무, 그리고 하늘이

하나의 점으로 모이는 것과 같죠.


그러나 하나의 소실점이 

되도록 그렸을 때

방안의 각종 물건과 상징들을 

의도한만큼 담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얀 반 에이크는 한 그림 안에

여러개의 소실점을 썼습니다.


바닥과 천장, 창문을

모두 조금씩 다른 각도에서 바라본 뒤

한 화면에 담은 것인데요.


덕분에 화면 속 부부는

거인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실제공간과는 맞지 않는 크기로

화면을 채우고 있죠.


어딘가 늘린 듯한 부부의 모습은

이 남다른 구도에서 나오는 것인데요.


극도의 현실적인 표현과

낯설게 비현실적인 구도가 합쳐져

매혹적인 그림이 된 것이죠.


그러나 그림에 숨겨진 비밀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1990년대 초

아르놀피니 부부가 1447년에

결혼했다는 문서가 발견되었습니다.


이는 그림이 그려지고 13년 후,

작가가 사망한지 6년 후의 일이었죠.


사람들은 아르놀피니 부부의 그림이

결혼식 당시의 그림이 아니라

약혼의 증명을 위해 그려진 것이 

아니냐고 추측했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 또 한 번 

파장이 일어납니다.





사실 아르놀피니 가문에는

두 명의 지오반니 아르놀피니가 있었습니다.


똑같은 이름을 가진 사촌 지간이었죠.


만약 그림에 그려진 남자가

이미 알려진 아르놀피니가 아닌 

사촌 아르놀피니라면

이 그림은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왜냐햐면 그의 아내는 그림이 

그려지기 1년 전에 죽었거든요


이 초상이 죽은 아내를 

기리기 위한 초상화일 것이라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죠.


만약 그렇다면 샹들리에를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샹들리에의 초는 단순히 

하나가 아닙니다.


아내 쪽의 초를 살펴보면

받침대 끝자락에 남은 

촛농 자국이 흘러있습니다.


사실 초는 2개였다가

그녀 쪽의 초가 모두 다 타버린 것이죠.


이는 그녀의 죽음을 상징할 수도 있습니다.

샹들리에 아래의 거울도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거울을 두르고 있는 원형장식에는

12개의 장면이 있습니다. 


예수의 수난을 그린 장면이죠.

이 원형무늬의 실제 크기는


손톱의 반절 정도 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장면이 어떤 장면들인지 

모두 알 수 있을 정도로

얀 반 에이크는 섬세하게 그려놓았습니다.


아르놀피니가 있는 왼쪽 무늬에는

모두 예수의 삶에 대한 장면을,

부인이 있는 오른쪽 무늬에는

모두 예수의 죽음에 대한 장면을 그려놓았죠.


결혼의 신뢰를 나타내는 

개 또한 다르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중세 시대에는 여성의 무덤에 

개를 많이 조각해 두었습니다.


그림 속 강아지 또한 그녀를 향해있죠.

이후에도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은

수많은 가설이 만들어지며

 풀리지 않은 난제로 남아있습니다.


많은 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이 작품 단 하나만을 연구하기도 하죠.



상징이 많다는 것은,

해석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니까요.


이렇게 아르놀피니 부부는 

사람들에게 아직까지 회자되며

관심을 받는데요.


사실적인 표현과 비교되는

비현실적인 구도.


그리고 그 안에 풀리지 않은 상징들까지

서로 뒤섞여 기이한 느낌을 줍니다


어쩌면 우리를 이끄는 것은

이 매혹적인 기이함이 아닐까요?

여러분은 이 그림에서 무엇을 보시나요?

이 콘텐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