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싸다고 명품은 아니다

조회수 2019. 12. 9. 15:3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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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을 주는 아이템

Writer 조성준 : 경제신문 기자. 소소한 재테크에서 재미를 느낀다.


루이비통, 에르메스, 샤넬, 구찌, 프라다, 지방시. 모두 제각각의 색으로 반짝반짝 빛나는 명품 브랜드다. 에르메스 가방이 아름답고, 구찌 옷이 멋지다는 건 누구나 안다. 단지, 그냥 알고만 있을 뿐이다. 애석하게도 대다수의 월급은 명품 아이템 단 하나를 구입하기에도 빠듯하다. 모두가 인정하지만, 아무나 누릴 수 없는 것들만 명품일까. 적어도 사전은 명품을 이렇게 정의한다. ‘뛰어나거나 이름난 물건 또는 작품’. 이 정의에 따르면 높은 가격은 명품의 필수조건이 아니다. ‘이름난 물건’이라고 해서 모두 비쌀 리는 없다. 오랫동안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불어넣고, 그들의 삶을 다채롭게 만든 브랜드를 소개한다.


와인 잔의 표본 ‘리델’(Riedel)

최근 몇 년 새 와인은 술 시장의 주류로 확 떠올랐다. 와인은 더 이상 특별한 날에만 즐기는 특별한 술이 아니다. 편의점에만 가도 가볍게 즐기기 좋은 ‘가성비’ 와인이 즐비하다. 대부분은 처음엔 1만 원 안팎 가격대 와인으로 입문한다. 그러면서 조금씩 자신의 취향을 발견한다. 묵직함을 좋아하면 까베르네 소비뇽, 온화한 맛을 원하면 메를로. 더 나아가면 관심사는 와인 잔으로 향한다. 특별한 날 괜찮은 와인을 골랐는데 그저 그런 와인 잔에 따르면 왠지 흥이 깨진다. 반대로 저렴한 와인이라도 근사한 잔에 따라 마시면 본래의 맛보다 조금 더 낫게 느껴진다. 기분 탓만은 아니다. 와인 잔은 와인만큼 중요하다. 사람마다 어울리는 옷이 다르듯 와인도 어디에 담기냐에 따라 매력이 달라진다.


괜찮은 와인 잔의 조건은 이렇다. 잔끼리 부딪혔을 때 나는 청명한 소리. 가벼운 무게와 얇은 두께. 잘 깨지지 않는 내구성. 이 모든 조건을 갖춘 브랜드는 리델이다. 300년 가까운 역사를 지닌 리델은 와인 애호가들에게 부연 설명할 필요 없는 와인 글라스의 왕국이다. 오직 가족 경영을 고수한 리델은 현재 리델 가문 11대손이 이끌고 있다. 리델은 임상실험 수준으로 엄격한 테스트를 거쳐, 품종에 따라 고유의 매력을 살려내는 잔을 개발했다. 리델의 최상위급 라인업 ‘소믈리에 시리즈’는 잔 하나에 20만 원에 달할 정도로 고가다. 주눅들 필요는 없다. 우리가 1만 원대 ‘가성비’ 제품으로 와인에 입문하듯 리델도 보급형 제품을 충분히 마련했다. ‘비늄 시리즈’ 정도로 시작하면 충분하다. 취향은 천천히 길러나가면 된다.


디터 람스의 ‘브라운’(Braun)

조너선 아이브. 한때 연봉 수백억을 받았던 세계 최고 산업 디자이너다. 그의 손을 거쳐 탄생한 제품을 나열하면 이렇다. 아이맥,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 애플 수석 디자이너였던 그는 어느 날 독일에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디터 람스였다. 조너선 아이브는 “제 작품에 영감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라며 디터 람스에게 존경을 표했다. 아이폰 한 대도 선물로 보냈다. 그렇다. 태초에 디터 람스가 있었다. 미니멀리즘 디자인의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여지없이 디터 람스를 만나게 된다.


산업 디자이너 디터 람스는 독일 가전회사 브라운(BRAUN)에서 40여 년간 일했다. 계산기, 시계, 텔레비전, 면도기 등 거의 모든 종류의 가전제품을 디자인했다. 그는 화려한 기교와 장식으로 고객을 현혹하는 디자인을 거부했다. 디터 람스가 중시한 건 ‘고객의 삶’이었다. 그는 디자인은 소비자가 제품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 가이드 역할을 해야 한다고 믿었다. 디터 람스는 무언가를 더 보태기보다는 무언가를 더 덜어낼 수 있는가에 집중했다. 그런 자신의 철학을 ‘Less but better’(더 적게, 하지만 더 좋게)로 요약했다. 오늘날 애플의 모토와 매우 닮았다. 디터 람스가 만든 제품은 단순하고, 우아하다. 그래서 수십 년이 흐른 지금 봐도 아름답다. 디터 람스의 철학은 디자인 영역을 넘어 삶에 관해서도 생각하게 한다. 우아한 삶을 원한다면 내게 필요 없는 부스러기부터 훌훌 털어내야 한다. 유려한 문장엔 불필요한 조사가 없고, 뛰어난 운동선수 몸짓엔 군더더기 없듯이.


나만의 책 ‘몰스킨’(Moleskine)

누군가는 몰스킨을 소개할 때 이렇게 말한다. “고흐, 헤밍웨이, 피카소가 사용한 공책”. 팩트는 조금 다르다. 현재 우리가 아는 몰스킨 브랜드는 1997년 이탈리아에서 탄생했다. 위에서 언급한 예술가 중 1997년에 살아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몰스킨은 유명한 예술가들이 사용한 프랑스제 공책 제조방식을 계승한 브랜드다. 어쨌거나 몰스킨은 피카소를 내세워 마케팅했고 이젠 피카소만큼 유명하다. 디지털 시대에도 아날로그 제품인 몰스킨은 연간 1000만 개 이상 팔리는 중이다.


몰스킨 디자인은 특별하지 않다. 단단한 커버, 아무 무늬 없는 검은색 표지, 옅은 바닐라 색 속지, 둥글게 처리된 모서리. 심플한 몰스킨은 어떻게 특별한 아이템이 됐을까. 단순히 무언가를 기록하기 위해서라면 꼭 몰스킨을 선택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스마트폰을 보유한 이 시대에 수첩은 거추장스러운 아이템일 뿐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몰스킨을 고집하는 이유는 이 제품을 ‘나만의 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들의 수첩’ 타이틀 덕분에 우리도 몰스킨에는 뭔가 그럴듯한 기록을 남기려 한다. 누군가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몰스킨에 적는다. 기억하고 싶은 문장을 몰스킨에 꾹꾹 눌러 쓰기도 한다. 그림을 그리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멜로디를 담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만의 스토리가 한 권의 책처럼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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