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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악의 리더 '공민왕' vs 최고의 리더 '정도전'

조회수 2020. 8. 12. 08: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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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워야 한다', '맞춰야 한다', '구석기 시대부터 배워야 한다' 등 역사에 대한 잘못된 통념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통념들을 깨기 위해 7회차 이시한의 점심약속에서는 교보문고 역사분야 1위 베스트셀러 <1페이지한국사365>의 저자 심용환 소장님을 모셨습니다. 


역사N교육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 심용환 소장님은 "역사는 관심있는 것부터 배우고, 편하게 읽고 들어야 한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레 상상력, 미래를 해석하는 통찰력이 생긴다." 라고 말씀하기도 하셨는데요. 역사를 통해 비즈니스, 인생의 지혜를 들어봤습니다.

출처: 이시한의 점심약속 7회 '역사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최고의 리더 '정도전', 최악의 리더 '공민왕'

두 지도자의 가장 큰 차이는 구체적인 비전의 유무라고 생각합니다. 공민왕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오랜 기간 원나라에 살면서도 고려 사회를 구원하겠다는 의지를 놓지 않았습니다. 기황후 일가를 처단하는 등 수차례 개혁의 걸림돌을 제거하기도 했죠. 무엇보다 반원자주정책에 관해서 탁월함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교체되는 국제적인 혼란기에 고려의 자주권을 확보하며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켜냈으니까요. 하지만 문제는 공민왕 사후 세상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구조적인 문제가 여전했고 수차례 추진된 여러 개혁조치들은 일관성을 가지고 관철되지 못했습니다. 집권 후반기 개혁 의지를 잃고 실정을 반복했기 때문에 그나마 이루어낸 개혁 조차 유지되지 못했죠.


정도전은 정반대의 길을 걸어갑니다. 정도전의 경우는 생애 대부분이 일진일퇴가 거듭되었을 뿐입니다. 20대에는 관료가 되어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 개혁 정치를 추구했지만 권문세족의 미움을 받았고 그로 인해 30대 전체를 방랑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40대에는 이성계와 함께 약 10년간 피튀기는 권력 쟁탈전에 뛰어들었죠. 결국 50대 초반이 되어서야 권력을 장악하고 조선을 세웠습니다. 정도전의 업적은 단순히 정치투쟁에서 성공하여 조선을 세웠다는데 있지 않습니다.


젊은 날에 품은 비전을 구체화했고 고려 사회의 모순을 해결할 수 있는 각종 방책을 준비했고 권력을 잡은 후에 이를 실천했다는 점입니다. 1391년 과전법은 소작농을 자영농으로 전환시키는 경제해법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주택난, 전세 문제를 해결하는 특단의 경제개혁인데 사회 혼란을 최소화하면서 자영농 육성에 성공, 이전과는 전혀 다른 안정적인 사회상을 창출해 냅니다.


또한 조선경국전, 고려국사, 불씨잡변, 진법 등 여러 기록을 남기는데 새로운 사회의 새로운 행정적 기초, 법적 기반, 경제 뿐 아니라 군사 제도에 이르기까지 그 내용이 방대하기 짝이 없습니다. 


약 6년 간 진행된 그의 노력은 조선 왕조의 근간이 됩니다. 태종은 물론이고 세종 역시 그가 설계한 기초 위에서 나라를 운영했던 것입니다. 


비전이라는 것은 뚜렷한 방향성과 함께 구체적인 에너지를 지녀야하고, 나아가 여러 사람들이 공감하게 함께 이루어가야 하는데 공민왕에게는 없었던 그것이 정도전에게 있었다는 거죠.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본 임진왜란, 병자호란

우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생각하면 보통 선조, 인조를 비판합니다. 무능한 리더십, 일희일비하는 태도 등이 문제가 됩니다. 틀린 얘기는 아닙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부분을 놓치고 있는 것만큼은 분명합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패러다임이 붕괴된 측면이 큽니다. 산성전투, 진관체제, 강화도 방어선. 한반도를 천 년간 지켜오던 고정관념이 모조리 무너져버리고 만 것입니다. 


고구려 시절부터 한반도에 살았던 우리 민족은 평소에는 평지에 세워진 성에 머물다가 전쟁이 나면 산성으로 들어갑니다. 


청야전술이라고 해서 주변의 모든 물자를 성안으로 끌고 오고, 주변을 불태운 채 산성에서 투쟁을 하는 방식입니다. 이러한 전법은 수나라나 당나라가 쳐들어올 때 큰 효과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임진왜란 때는 한계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산성은 대부분 북쪽에서 내려오는 군대를 상대하고자 만들었는데 적은 남쪽에서 몰려왔고 보급품 유지 방법이나 산성 돌파 전법 등 과거에는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방식으로 인해 산성전투가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산성전법의 무용함은 병자호란 때도 반복됩니다. 청나라 군대가 산성을 점령하기 보다는 곧장 수도로 진격을 하는 전법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일본으로 잡혀갔던 강항은 <간양록>에서 산성전투의 무용함을 통렬히 지적합니다.


진관체제는 지역단위 방어체제를 말합니다. 고려 말 왜구를 상대하기 위해 고안해낸 방법인데 이 또한 임진왜란 당시 무용했습니다. 


왜구는 적은 병력으로 해안선 일대를 공격했습니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지방군을 잘게 나누어서 지역을 관리하게 만들었는데 임진왜란 때는 5만의 대군이 동시에 쳐들어오니 진관 체제가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강화도 방어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몽골의 침략 당시에는 수만의 삼별초가 이 곳을 지켰고 몽골인들이 물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전법이었습니다. 


몽골의 다른 지역에 비해 고려 점령에 소극적이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화도에서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고 고려군이 간신히 막아내기가 여러 차례였습니다. 이런 당시의 정황을 무시한 채 병자호란 때 조선 조정은 무작정 강화도로 피하려고만 했습니다. 


막연하게 최고의 방어선이라고 믿었던 것이죠. 하지만 강화도는 해안선이 김포지역과 길게 맞닿아 있기 때문에 수비할 곳이 많고, 청나라 군대는 물에 익숙할 뿐 아니라 당시 명나라 수군까지 접수한 상태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강화도를 수비하는 군대는 몇 백이 안되었으니 결과는 자명할 수 밖에 없습니다.


두 차례 전투에서의 패배는 패러다임의 측면에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동안은 리더십에 집중했었습니다. 국왕의 무능한 리더십을 중심으로 전쟁의 승패를 분석했었죠. 


하지만 패러다임의 관점에서 본다면 조선은 보다 근본적인 위기에 빠져 있었고 결국 전쟁에서 패배를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입니다. 관점을 조금 바꾸어봅시다. 그러면 전쟁의 승패에서 기존과는 다른 교훈을 얻을 수 있답니다.

퇴계 이황과 율곡이이, 두 천재의 정반대 삶

퇴계 이황은 조선을 넘어 동아시아의 위대한 지성이었습니다. 성리학에서 심성론이라는 분야를 개척하였고 중국에서도 하지 않았던 사유의 세계를 열었으며 양명학자들과 설전을 벌이며 조선 성리학을 발전시킨 인물입니다. 쉽게 말해 동아시아의 헤겔, 하이데거, 사르트르 같은 인물이었다고 생각하면 좋을 듯 합니다.


한 편에서 퇴계 이황은 삶을 멋지게 향유하는 멋지고 다정하며 감수성 여린 선비였습니다. 아름다운 풍광을 사랑했고, 좋은 경치를 발견하면 며칠씩 머물며 시를 쓰며 사람들과 여흥을 즐겼다고 합니다. 


도산 서당이라는 10평도 안되는 작은 서당을 꾸리고 앞에 작은 정원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에게 찾아오는 이들과의 토론과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젊은 청년들의 대범한 도전도 다정하게 대응하며 치열한 학문 논쟁을 수년씩 이어가기도 했습니다. 담백한 삶을 살았다고 할까요?


그의 소박한 삶은 최근에 많이 이야기되는 미니멀리즘적인 삶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겠죠. 또한 그러한 그의 흥취있는 삶, 제자들과 공부하는 삶은 수많은 인재들을 배출하는게 큰 도움을 주었답니다. 


조선 전기 연산군등이 주도한 사화를 통해 인재들이 죽어나가고 씨가 말라갔는데 퇴계 이황의 인문학적인 삶은 피폐한 조선 지성계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으니까요.


율곡 이이는 보통 퇴계 이황에 비견됩니다. 하지만 둘의 삶은 참으로 달랐습니다. 이황은 학문함을 즐겼고 관료의 삶을 배격했습니다. 


하지만 이이는 학문에도 열심이었고 동시에 관료가 되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의지도 대단했던 인물입니다. 그는 언제나 구체적으로 해결 방안을 제시했고, 현실 가운데 응용가능한 대안을 마련했던 인물입니다.


사상의 독특함에 있어서는 이황에 미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황과 대립하며 조선 유학의 다른 방향을 설계했던 인물인데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철학 논쟁에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백성을 위한 통치를 고민했고 부국강병에 이르는 사회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플랜을 설계한 인물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국왕 선조는 개혁 의지가 없었고 신하들은 당쟁만 일삼을 뿐이었습니다. 척박한 환경으로 인해 율곡 이이는 아무런 업적도 이루지 못하고 생을 마무리하고 맙니다. 


두 사람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해 고민해 볼 수 있습니다. 꾸밈이나 부차적인 것에 얽매이지 않는 담백한 삶은 비전을 성취하는데 어떤 힘이 될 수 있을까.


뛰어난 인재는 왜 성과를 내지 못할까. 조선에 대해 조금 더 깊이 이해하면 오늘 우리의 조직과 우리의 성취에 관해 배울 점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 라이브방송 링크 안내(이시한의 점심약속 7회차 방송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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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영상) 역사는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https://tv.naver.com/v/15148426

최고의 리더 정도전, 최악의 리더 공민왕에게 비즈니스를 배우다 https://tv.naver.com/v/15157416

임진왜란, 병자호란 우리는 완전히 잘못 알고 있었다 https://tv.naver.com/v/15157447

퇴계이황과 율곡이이, 두 천재의 정반대 삶 https://tv.naver.com/v/15157475

역사와 여행, 제대로 즐기는 방법 https://tv.naver.com/v/15157543

인터비즈 조현우
inter-biz@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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