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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에는 이왕이면 이 소주를 먹어야 하는 이유

조회수 2021. 2. 27. 06:0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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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로 유명한 소주 회사, 새삼 다시 보게 됐습니다

102번째 3.1절이 다가왔다. 3.1운동은 일제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이다. 또 1차 세계대전 이후 식민지에서 일어난 최초의 독립운동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때 많은 사람이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힘을 보탰다. 하지만 이미 10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과거를 잊는다. 하지만 그때 그 사람들의 용기 있는 행동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당시 독립 운동에 기여한 기업을 찾아봤다.

출처: 하이트진로 유튜브 캡처
진로이즈백

소주의 대명사인 진로. 1924년 태어난 진로는 독립을 원하는 한 교육자의 열망이 낳은 상품이다. 진로 창업주 장학엽 회장은 독립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진로를 세웠다. 장 회장은 황해도 곡산의 공립 보통학교 교사로 일했다. 일본의 민족 말살 정책이 한창이던 1920년대 일본인 교장 밑에서 일했던 장 회장은 학생들에게 꿋꿋이 조선어를 가르쳤다고 한다. 결국 수업 시간에 우리말로 노래를 부르게 했다는 이유로 해고당했다. 그는 자신의 손으로 학교를 세우겠다고 결심한다. 설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시작한 사업이 바로 양조장이다.


장 회장은 진천양조상회를 설립하고 진로라는 이름의 소주를 만들어 팔았다. 진로는 이후 하이트맥주와 합병으로 지금의 하이트진로로 다시 태어났다. 하지만 회사는 장 회장의 애국정신을 잊지 않았다. 그래서 독립유공자 돌봄 사업을 펼친다. 매년 임직원이 적은 금액일지라도 돈을 모아 기부한다. 또 광복절 기념품을 제작해 역사를 되새긴다.


또, 100년 역사의 민족기업의 정신을 이어받아 나라사랑 캠페인에도 적극적이다. 2015년에는 '광복 70주년 기념, 해외 독립운동 유적지 지원 캠페인'을 진행했다. 하이트, 참이슬 판매 수익금을 기부해, 해외 소재 독립운동 유적지 2곳의 안내 브로셔 제작, 안내판 교체, 현판 제작에 지원했다.

출처: 참이슬 인스타그램·진로 인스타그램
하이트진로 광고 모델인 가수 아이유와 두꺼비 캐릭터

LG그룹, GS그룹 그리고 교보생명은 독립운동을 뒤에서 도운 회사로 널리 알려져 있다. LG그룹 창업주인 구인회 회장은 1942년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 독립운동 자금 1만원을 지원했다. 1940년대 쌀 한 말이 20원 정도 였던것을 고려하면 큰 금액이다. 당시 안희제 선생은 지명 수배를 받고 있었다. 그를 돕는 것은 집안이 풍비박산 날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었다. 하지만 구 회장은 “당할 때 당하더라도 나라를 되찾는데 힘을 보태야 겠다”고 했다.

출처: GS25 페이스북
GS25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독립군 이름과 어록을 붙인 도시락을 출시했다.

GS그룹 허창수 명예 회장의 할아버지 허만정은 백산상회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백산상회는 독립운동의 자금줄이었다. 안희제 선생은 1914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백산상회를 세웠다. 1919년 백산상회는 사명을 백산무역주식회사로 바꾸고 사업을 확장했다. 이때 GS그룹의 창업주인 허만정 회장이 백산무역주식회사의 주주로 참여했다. 곡물, 면직물, 해산물 등을 판매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상회의 표면적인 모습이었다. 사실 백산상회는 독립군을 지원하는 자금조달 본부였다.


교보생명 창업자인 신용호 전 회장은 독립운동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신예범과 큰 형 신용국 모두 독립운동가였다. 그래서 신 회장의 가족은 항상 일제에 쫓겨다녔다. 그는 스무살에 중국으로 떠나 민족시인 이육사를 만나며 독립운동을 돕겠다고 다짐했다. 사업가가 되어 동포를 구제하는 민족자본가를 꿈꿨다. 그는 곡물유통업체 북일공사를 설립해 수익 대부분을 독립자금에 보탰다.

◇한인소년병학교 출신 유일한 박사

출처: 유한양행 홈페이지
1971년 3월 대한민국 최초로 한 사업가가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했다.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한 유일한 박사였다. 그는 조선의 열악한 위생·보건 향상을 위해 1926년 제약회사 유한양행을 설립했다. 유한양행은 기업을 세습하지 않고 전문경영인 제도를 운영하는 등 모범적인 업체로 손꼽혔다.

유일한 박사는 학창시절부터 독립운동을 했다. 그는 9살에 미국에 넘어가 1909년부터 1912년까지 한인소년병학교에 다녔다. 대학생이던 1919년 서재필, 이승만, 조병옥, 임병직과 함께 한인자유대회를 개최했다. 한인자유대회는 3.1운동 직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독립운동과 임시정부 수립을 알리기 위해 열린 한국인 모임이었다. 또 미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대한인국민회에서는 자발적으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후원금을 보냈다. 유일한 박사 역시 후원금을 보냈다.
출처: 동화제약 인스타그램
동화제약 활명수 광고 모델인 배우 서현진

국내 최장수 의약품 까스활명수는 동화약품의 대표 제품이다. 활명수도 일제강점기 임시정부 운영자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동화약품의 전신인 동화약방 설립자 민강 사장은 유명한 독립투사다. 그는 당시 독립운동을 위한 국내외 연락 통로 역할과 정보 수집을 담당했다고 한다. 동화약방 본사에서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 독립운동가 간 비밀 연락망인 서울연통부도 직접 운영했다. 또 민 사장은 사람을 살리는 물이라는 뜻을 가진 활명수를 만들었다. 이를 판매한 돈으로 임시정부에 보낼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했다. 한 병 값이 당시의 막걸리 한 말 정도였다. 독립 운동가들은 중국으로 이동할 때 활명수를 가져가 현지에서 비싸게 팔았다고 한다.


1909년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한성임시정부 수립을 시도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민 사장은 옥살이를 2번이나 겪기도 했다. 결국 민 사장은 48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지만 동화약품에는 그의 독립 정신이 그대로 남았다. 민 사장의 옥살이로 위기에 빠진 동화약방을 인수한 윤창식 5대 사장 역시 민족 경제 자립을 목표로 한 조선산직장려계와 신간회 등을 지원했다. 윤 사장의 아들인 윤광열 7대 사장 역시 중국 상하이에서 광복군 중대장을 맡아 독립운동을 위한 무장투쟁에 참여했다고 한다.


◇40년 이상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장학금을 준 이재현 회장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연당 이갑성 선생

조양국제종합물류의 이재현 회장은 이갑성 선생의 손자다. 연당 이갑성 선생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명이다. 이재현 회장은 할아버지의 뜻을 따라 1978년 조양국제물류 설립하면서 국가유공자 자손들을 지원하는 연당장학회를 세웠다.


올해 43년을 맞이한 연당장학회는 지금까지 500명이 넘는 학생이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 선생은 독립운동을 한 이들의 후손 중 형편이 어려운 학생이 있으면 공부를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라고 했다. 조양국제물류는 사업의 어려웠던 창업 초기부터 매달 빠짐없이 연당장학회를 통해서 광복회에 장학금을 보냈다. 이 회장은 2018년 한국경제 인터뷰에서 “장학금을 받은 이들이 사회에서 자리를 잡고 다시 연당장학회에 기부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교육이 힘이라 믿은 미래엔 김기오 선생

출처: 미래엔 홈페이지

국내 최초의 교과서 출판사 미래엔은 1948년 문을 연 기업이다. 당시 이름은 대한교과서였다. 대한교과서 창업주 김기오 선생도 독립운동에 참여한 인물이다. 그는 양산신간회 준비위원 7인 중 한명으로 1928년 양산신간회를 조직했다. 신간회는 각 지역을 돌면서 강연회를 열어 조선인에 대한 착취 기관 철폐, 일본인들의 조선 이민 반대, 타협적 자치 운동 배격, 조선인 본위 교육제도 실시 등을 외쳤다. 그는 신간회와 청년동맹 등에서 반일운동을 펼치다 1930년 일제 경찰에 체포됐다. 결국 심한 고문으로 양 다리를 쓰지 못하는 불구의 몸이 됐다.


감옥에서 나온 뒤 그는 우리 민족이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해 식민지로 전락했다고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교과서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우리나라의 정신을 가르치기 위해 힘썼다. 그는 대한교과서 이전에 운영했던 인쇄소 문화당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책자와 유인물, 선전물 등을 만들었다. 6.25 전쟁 중에도 교과서를 발행하기 위해 인쇄기를 직접 챙기는 등 평생을 문맹퇴치와 민족교육을 위해 살았다고 한다.

◇6.10 만세운동 주동자로 붙잡힌 효성그룹 조홍제 회장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도 일제와 싸운 독립운동가다. 조 회장은 섬유 생산 업체인 동양나일론을 효성그룹으로 키워낸 인물이다. 그는 19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그가 3학년이었던 1926년 순종황제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분노한 조 회장은 거리로 뛰쳐나갔다. 바로 6.10 만세운동이다. 시위 주동자로 붙잡혀 종로경찰서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고 학교도 퇴학당했다. 그의 아들인 조석래 전 효성 회장은 평소 “1945년 8월 15일 라디오에서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식이 나오자 나를 무릎에 앉히고 애국가를 가르쳐 주시던 아버지 목소리가 생생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효성그룹은 이러한 조홍제 회장의 정신을 이어받아 중국의 독립운동 유적지 보존을 위한 지원금을 전달하는 등 활동을 하고 있다.

◇김구 선생의 손녀사위 빙그레 김호연 전 회장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홈페이지
백범 김구 선생

빙그레 공익재단은 2018년부터 독립유공자 후손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작년에는 45명의 학생에게 6000만원을 지급했다. 3년동안 지급한 금액은 1억8000만원이다. 사실 빙그레 공익재단이 독립유공자 후손을 돕는 데는 이유가 있다. 바로 김호연 전 빙그레 회장이 백범 김구 선생의 손녀사위기 때문이다.


김 회장은 장학 사업 외에도 여러 사업을 펼치고 있다. 1993년 12월 본인의 돈으로 재단법인 김구재단을 설립했다. 또 이봉창 의사 기념사업회 회장, 백범 김구 선생 기념사업협회 부회장, 독립기념관 이사 등의 활동을 통해 다양한 독립유공자 지원 사업에 힘써 왔다. 이외에도 백범 서거 60주년이었던 지난 2009년 4월 미국 브라운대학교에 김구도서관을 설립하고 한국학 관련 서적을 기부하기도 했다.


글 jobsN 이상현 인턴

jobarajob@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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