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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삶을 나눴던 자동차 - 르노 4

조회수 2021. 1. 18. 17: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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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부터 30년 남짓 프랑스와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대중차

1990년대를 전후해, 가솔린 엔진의 불완전 연소, 고온 반응 등으로 발생되는 자동차 배출가스의 유해성이 화두가 되어 여러 개선 방안이 모색되고 있었다. 그런 활동의 하나로 배출가스의 유해 성분을 줄이기 위해 무연 휘발유와 촉매 장치 사용 등의 의무화가 시행되었다. 인류가 건강한 삶을 영위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런 규제를 따라가지 못할 자동차는 양산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출처: veikl

이탈리아, 독일 등 여러 나라에서 생산되고 100개 이상의 국가에 800만 대 이상 판매된 스터디셀러 르노 4도 시대의 변화에 따른 요구에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의 다양한 요구에 발맞출 수 있는 소명을 갖고 태어나, 한때 유럽 자동차 디자인의 아이콘이었고 위대했던 자동차의 역사적 가치를 뒤돌아 보려 한다. 한 해를 시작하며 사라져야할 것과 남겨야 할 것이 있듯 말이다.

르노 4 탄생의 사명

제2차 세계대전 후 르노는 나치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자산이 국가에 귀속되었다. 이후 정부 주도하에 어렵지 않게 사업을 하던 이 업체는 1956년에 대전환기를 맞이했다. 그 당시 피에르 드레퓌스(Pierre Dreyfus)는 르노의 수장이 되어, 2년여 동안에 르노를 세계에서 여섯번 째로 큰 자동차 메이커로 성장시켰지만 모든 것이 만족스럽지는 않았다. 그가 회장에 취임하기 전 3년여 동안 르노의 효자 상품이었던 4CV의 100만 대 판매 성적에 비해 후속작인 도핀(Dauphine)은 반 정도밖에 못 미쳤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도핀이 가진 디자인과 성능 등의 탓이 아니었다.

출처: Renault
르노 도핀

바로 세계 대공황의 영향으로 금본위 제도의 체제가 무너지기 시작하며 자국의 이익이 우선인 시대로 전환되는 과정이기 때문이었다. 그로 인해 세계 각국의 관세가 오르며 도핀의 수출에 문제가 생겼던 것이었다. 르노의 경영진들은 ‘무상으로 차만 고쳐주면 되겠지’란 안일한 생각으로 최장 6개월의 개런티 프로그램을 선보였지만 시장의 반응은 잠시뿐이었다. 기존의 모델과 다른 완전히 참신한 모델이 필요하다는 것을 피에르 회장은 깨달았다. 값비싼 세단이나 고성능 스포츠카는 시장과 대중의 외면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자동차를 원했다.

출처: Renault

새 모델을 기획하며 피에르 회장은 “이런 어려운 상황을 돌파할 새 모델은 도핀보다 기능적, 실용적으로 앞서면서 더 저렴해야 한다”라며 방향을 제시했다. 또한, 농촌에서 도시 쪽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여성의 고용률이 높아지며 노동보다 삶의 가치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그가 취임 후 3년 만에 내놓은 새로운 모델이 바로 르노 4였다.

출처: Renault

이 자동차가 쇼윈도에 등장하자마자 시트로엥은 자사의 자동차 2CV를 카피한 것이라 주장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오해였다. 왜냐하면, 2CV와 르노 4는 디자인과 파워트레인뿐 아니라 기획 단계부터 확연히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패션의 변화도 자동차과 비슷하다는 생각으로 청바지의 개념을 자동차 역사에 접목하려 노력했고 블루진의 성공 신화에서 새 모델의 존재가치를 찾으려 했다.

블루진의 개념, 새 모델에 생기를 불어넣다

1800년대 후반에 세상에 나온 청바지는 작업복 등으로 시작하여 패션 아이템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해 남녀 구분 없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었다. 빨간 탭의 501을 선두로 한 블루진은 제임스 딘, 그레이스 켈리 같은 당대 최고의 할리우드 스타들도 애용하는 아이템이었다. 격식 없고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유스러움과 편안함이 강점이었던 데님의 개념이 르노의 자동차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것이라고 피에르는 예상했다. 

출처: Wikimedia Commons
르노 4의 모티브가 된 리바이스 청바지와 빨간 탭

그의 이런 생각은 연비 걱정 덜하고, 파워트레인 등의 내구성에 대한 신뢰도가 높고, 사용할 수 있는 범위가 넓은 다목적 자동차를 기획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다. 청바지가 가진 인류와 삶의 친밀함 등의 개념을 반영해 ‘인생을 위한 자동차’(Voiture à vivre)란 슬로건을 내걸고 자동차를 제작하였다. 이렇게 1960년대 전후 사회 변화와 요구에 부합하는 다재다능하고 저렴한 르노 4가 세상에 등장하게 되었다.

르노 4는 기획 단계에서부터 출퇴근, 쇼핑, 여행 등 다양한 목적에 알맞게 기존의 플랫폼과 완전히 다른 설계의 섀시가 필요했다. 기존 모노코크 방식은 밴이나 세단 등 다양한 형태의 차량을 생산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과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개념의 섀시를 디자인했다.

출처: Wikipedia

보디 온 프레임 방식을 기초로 프레임을 평평한 바닥 형태로 디자인해 16개의 볼트만으로 차체를 고정하는 형태로 디자인해 제조 단계를 최대한 단순화하고 생산 비용을 낮췄다. 또한 기존의 리어 엔진 후륜구동 방식을 과감히 버리고 엔진을 앞으로 옮기면서 동시에 전륜구동을 채택했다. 이로써 트렁크의 적재공간이 늘어나고 뒷좌석 공간이 넓어지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았다. 이로써 르노 4는 양산 메이커 처음으로 자동차 뒤쪽 테일게이트를 열어 짐과 사람이 드나들 수 있는 해치백 모델이 되었다.

극한의 시험으로 신뢰성 검증해

르노 4는 그 밖에도 당시 혁신적이라 불리는 여러 기술을 적용했는데, 그중에서 고속의 오토바이의 주행 안정성을 위해 개발된 유압 텔레스코픽 쇼크업소버를 전체 바퀴에 독립적으로 채용한 것은 많은 사람의 관심을 끌었다.

그뿐 아니었다. 뒷바퀴에 좌우 독립인 트레일링 암과 가로배치 토션 바 스프링을 적용하여 굴곡이 심한 도로에서도 차체의 수평유지가 가능했다. 앞바퀴에는 독립적으로 위시본 형태의 어퍼암과 로어암이 적용되며 고정된 타이 로드에 연결되었다. 조향 너클 상하부에는 볼 조인트가 있어 스티어링과 서스펜션의 움직임을 모두 받아 주었다. 토션 빔은 배기구 방향으로 설치하여 독특한 서스펜션을 갖고 있었다. 이는 최고의 승차감을 제공하기 노력의 결실이었다.

출처: Renault

또한 일반도로뿐 아니라 고속도로 주행에서도 경쾌함을 잃지 않기 위해 랠리에서 성능이 입증된 4CV의 엔진을 르노 4의 초기 모델에 채용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엔진 배기량도 조금씩 키웠다. 르노 4는 기존의 모델과 달리 수랭식 엔진과 5,000km마다 1회 점검만 받아도 되는 밀폐형 냉각 시스템을 적용하여 영하 40도 이하나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냉각수를 교환하지 않아도 되도록 디자인되었다. 이것은 자동차가 운전자에게 함께할수록 편한 자동차(voiture facile à vivre)로 다가가기 위한 하나의 서비스였다.

이와 같은 여러 기술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3년의 개발 기간 수많은 엔지니어와 테스트 드라이버가 각고의 연구와 노력으로 만들고 검증했다. 신뢰성을 높이기 위해 아프리카 사하라 사막, 핀란드의 눈과 얼음이 쌓인 도로, 프랑스의 험로 등 자동차가 달릴 수 있는 곳은 어디든 달렸다.

심지어 르노의 테스터들은 이 모델의 프로토타입으로 약 200만 킬로미터를 주행했다는 말도 인터뷰를 통해 전해졌다. 이런 극한의 실험은 남다른 내구성과 출력 그리고 승차감 등을 가진 모델이라는 것을 어필하려는 훌륭한 시도였다. 이와 같은 노력 끝에 1961년 르노 4가 데뷔한 것이다.

30년 이상 진화한 글로벌 모델

출처: Renault
르노 4 포고네트

이후 르노 4는 한가지 모양만 고집하지 않았다. 1961년 파리 모터쇼에 르노 3과 르노 4만 세상에 등장한 것이 아니었다. 르노 4를 바탕으로 747cc 엔진을 얹고 차체에 6개의 사이드 윈도가 달린 리무진(limousine) 버전도 함께 출시했다. 이 모델은 이후에도 가장 대중적인 모델로 ‘까트르엘(Quatrelle)’ 또는 4L이란 차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모터쇼 직후에는 첫 번째 밴 버전인 포고네트(Fourgonnette)를 선보였다. 이 모델은 적재량이 300kg이었고 옵션으로 지붕 끝이 위로 열리는 일명 기린 지붕(giraffe roof)을 선택할 수 있었다. 

이듬해 32마력으로 출력을 높인 르노 4 슈퍼도 선보였다. 이 모델은 르노 4의 럭셔리 모델로, 기존 위로 열리던 해치의 힌지를 아래로 옮긴 접이식 리어 해치로 문턱 없이 짐을 싣고 내리기 편리했다. 이것은 삶의 편리함을 추구한 르노 4의 탄생 소명과 부합한 서비스의 결과였다. 하지만 르노 4는 기능적인 면만 강조한 차는 아니었다. 

출처: Renault
르노 4 파리지엔느

1963년 등장한 ‘파리지엔느(Parisienne)’는 르노 4에 엘레강스한 도시의 멋을 입힌 패셔너블한 자동차였다. 패션 잡지인 엘르(ELLE)과 협업으로 제작되어 단종된 후에도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이후 르노 4의 공식 차명이 변경되었다. 공식적으로 르노 4(R4)는 르노 4 룩스(LUXE)로, 까트르엘(R4L)은 르노 4 익스포트 그리고 포고네트는 밴으로 불렸다. 1968년에 르노 4의 카브리올레 버전인 ‘쁠랑 에어(Plein Air)’가 등장했다. 이 차를 통해 해변과 사막 등 자연과 함께 여가 시간을 즐기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동차로 변신하면서, 르노 4는 사람들의 삶에 더욱더 가깝게 다가가는 자동차로 인식되었다. 

출처: Wikipedia
르노 로데오 4

또한 간단한 이삿짐이나 가구 등을 옮기길 원하는 고객층이 생기면서 1960년대 후반부터 일반 모델의 뒷좌석을 접을 수 있었다. 1970년 이후에는 안전벨트가 장착된 모델과 쁠랑 에어를 대체할 수 있는 로데오 4가 세상에 등장했다.

1970년대에는 히피 문화에 발맞춰 어디서든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있도록 강화된 배터리를 적용하고 시대 분위기에 발맞춘 한정 모델을 꾸준히 내놓으면서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 성공하였다. 1978년 이후 강력한 출력의 1,108cc 엔진을 탑재한 르노 4 GTL과 사파리 모델을 출시하며 시원한 주행과 여행의 즐거움을 함께할 이미지를 높였다.

출처: la4dldesylvie
르노 4 조깅 홍보물

그것만이 아니었다. 르노 4 탄생 20주년 기념 5,000대 한정판 모델을 르노 4 조깅(Renault 4 Jogging)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 캔버스로 만들어진 문루프와 밝고 경쾌한 색상을 보디와 실내에 사용하여 활기차고 센스 있는 20대의 젊음을 표현한 자동차였다. 1990년대 르노 4의 단종의 시간이 다가올 때까지 전 세계 사람들의 삶에 동반자로서 편리하고 재미있는 자동차로 업그레이드되었다. 그럴 때마다 즐거운 이벤트와 한정판 모델로 르노 4는 사람들과 함께했다.

1992년, 세계 자동차 업계는 더 엄격한 공해 방지 기준의 도입으로 무연 휘발유와 매연 저감 장치를 사용해야만 했다. 변화의 흐름에 맞춰 성능과 외향 등을 달리하고 즐기던 르노 4도 따라갈 수 없는 시대가 왔다. 하지만 허무하게 사라질 스테디셀러가 아니었다. 르노는 1,000대의 특별 모델을 생산하기로 했다. 전작이었던 르노 4 클랜과 큰 차이는 없었지만 밝고 순수한 헤어짐의 인사말 ‘바이 바이(Bye Bye)’와 생산 순서를 1,000에서 1로 카운트다운한 번호가 새겨진 명판을 대시보드에 장식한 르노 4였다. 사람의 삶을 위해 태어난 차는 떠날 때도 유종의 미를 남긴다는 것을 보여준 이벤트라 생각한다.

출처: Renault

이렇게 르노 4는 떠났지만, 당시 유연 휘발유에 있던 납 성분 등으로부터 인류의 건강을 지켜줄 여러 가지가 등장했다. 배출가스 촉매변환기라든가 무연 휘발유 엔진을 얹은 자동차 같은 것들 말이다. 한 해를 떠나보내며 또 다른 새로운 만남의 기회가 생길지 모른다는 것을 르노 4가 말해주는 듯하다.

글 윤영준 (자동차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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