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화가, 영원으로 향하는 그녀의 조형세계

조회수 2020. 11. 2. 10:23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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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경미

작가 이경미

예술은 우리에게 삶을 바라보는 다양한 관점을 제공한다. 그러나 아무리 새로운 예술 언어로 세상을 탐구한다 할지라도, 삶에는 인간의 영역으로 해석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운명의 모순 또한 반드시 존재하는 것 같다.

[예술, 시대를 초월하는 언어]


20세기 미국의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Miller Hemingway)는 때로 우리가 진실을 발견하지 못하고, 진실이 우리를 발견한다고 이야기했다. 어떤 일들은 나의 이해보다 빠른 속도로 불현듯 찾아와 혼돈으로 머무르는 것 같다. 유년시절 이경미 작가가 느꼈던 본인의 삶이 그랬다. 그는 집을 나간 엄마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긴 기다림 속에서 끝없는 외로움을 반복적으로 느꼈다. 상실에 대한 경험은 성인이 되어 작가로서 이름을 알렸을 때도 여전히 우주 한가운데에 홀로 표류된 듯한 고독으로 머물렀다.


남편의 회사 내 리로케이트로 독일에 거주하던 시절, 그는 헤센주 다름슈타트에 위치한 헤센 주립 자연사 박물관에서 알프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가 요한 계시록을 근거로 남긴 열다섯 점의 목판화 작업과 마주했다. 독일 르네상스 시대를 꽃피운 젊은 거장의 작품 앞에서 그가 느낀 숭고함은 곧 ‘나는 누구인가.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관념적 질문으로 이어졌다.


“작품을 보며 직접적인 판단과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오히려 판단을 유보하는 방향을 의도했어요. 세상은 지금 현재의 단편적인 문장이나 이미지 하나만으로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복잡하고 어렵잖아요.”

ㅣ 나의 나나에게

NANA I – Oil on canvas, 118x92cm, 2007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한 작가는 회화를 배우고자 이미 졸업한 학교의 3학년 회화과로 편입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1998년, IMF로 한국 경기에 찬바람이 불던 그 해 태어난 나나를 그는 새로운 가족으로 맞이했다. 나나는 자주 여러 번 아팠다. 요로결석이 심해 복강수술을 세 번이나 하는 나나의 모습을 지켜본 가족들은 그에게 나나의 안락사를 권했다. 생활비를 벌며 대학에 다니느라 본인의 건강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딸이 안쓰러웠던 어머니는 나나를 버리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나나를 그렸다.


과제를 해야 하니 버리지 말라며 계속 나나를 그렸다. 고양이를 왜 그렇게 크게 그리냐며, 물감이 아깝다는 교수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그 후로도 작가는 계속 나나를 그렸다. 다른 교수님들이 모두 석연치 않아할 때, 적어도 한 분은 그의 작업이 새롭다며 계속 그려보라며 그를 응원했으니 괜찮았다. 다음날의 먹거리를 걱정하며 오로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시간들 속에 그는 현실을 잊기 위해 더욱 죽어라 일을 했다. 깨어있는 모든 시간 동안은 계속 일을 했고, 집에 오면 쓰러지듯 잠들었다.


이 시기, 그에게 학교 공부는 취미나 마찬가지였다. 팔을 다쳐 일을 하지 못하고 집에 계신 어머니가 넌지시 건네는 관심의 말조차 버거울 만큼 힘든 시기였지만, 그에게 다가와 볼을 비비며 나지막하게 ‘야옹~’하는 나나의 존재는 그에게 누군가의 백 마디 말보다 훨씬 큰 위로였다.


나나의 맑은 눈빛에는 인간의 언어로 풀 수 없는 강한 힘이 존재하는 듯했다. 칼 세이건이 말한 ‘창백한 푸른 점’과 같은, 세상을 초월하는 영역이면서 동시에 현실의 그를 살리는 구원의 빛이었다.

그는 언제나 나나를 지켰고, 나나도 언제나 그를 지켰다. 19년의 길고도 짧은 생을 마치고 나나가 우주로 돌아갈 때, 그는 품 안에서 나나를 보내주며 다시 만나자고 지구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지막이 건넸다.


한때는 다양한 작업을 하는 작가인데 고양이 작가라고 불리는 것이 족쇄처럼 느껴져 싫었다. 그래서 잠시 고양이를 그리지 않으려고 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나나가 떠난 후 그는 자신에게 붙는 어떤 수식에도 개의치 않고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나나를 그리고, 만들었다. 이 말을 마치고 인간이 참 미련하다며 웃는 그였다.


ㅣ 구조의 순환, 스트릿 시리즈

문을 열고 나가면 문 밖에 거대한 진실이 있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거대한 자연이 있다. 하지만 인간은 그 문이 닫혀 있을 때는 문 밖의 진실, 그 존재 자체를 잊어버리고야 만다. 그것이 인간이다.

이경미 작가의 저서 ‘고양이처럼 나는 혼자였다’ 중
Sanfrancisco on the table, 90x90x10cm, Oil on constructed birch panel, 2012

이경미 작가의 저부조 회화 작품들은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으로부터 출발한다. 작가는 자신이 느꼈던 고독과 이를 초래한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집안 형편을 고려해 다른 직업을 가질 수도 있었지만, 만약 작가가 되지 않는다면 마음속에 품은 질문들은 모두 응어리로 남거나 한 줌 바람에 사그라드는 촛불처럼 소멸되어 나라는 작은 존재조차 무의미해질 것 같았기에, 그는 주저 없이 작가가 되는 길을 택했다.


설령 고통스러운 현실을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할지라도 캔버스에 그의 가치관을 투영함으로써 해소하는 일은 충분히 가능했으니. 끝이 보이지 않는 영속성의 우주공간에 던져진 미아처럼 헤맬 때, 시각적 공감각적 경험을 화면에 풀어두는 행위를 통해 그는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ㅣ 찬란한 시절을 통과한 인간에게 남는 것, 풍선 시리즈

The Savage God, Oil on canvas&panel, 265x265cm, 2011
DEFLATED LOVE, Oil on constructed birch panel, 55x55x7cm, 2016
I Got Life, Oil on constructed birch panel, 104x104x10cm, 2018

이경미 작가의 아버지가 생전 여러 가지 직업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으로 하셨던, 그리고 가장 오래 하셨던 일이 바로 풍선을 판매하는 일이었다. 하나하나 바람을 넣어 빵빵하게 부풀려 띄운 풍선을 보고 있노라면 그도 덩달아 둥실둥실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아졌다.


성인이 된 작가가 결혼 후 남편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있을 때, 한 번은 스물네 시간 운영하는 큰 슈퍼에 갔다가 진열대 한편에 놓여 있는 풍선 더미를 봤다. 한국에서 어버이날 카네이션을 사서 집으로 들고 가듯, 미국에서는 어린이날, 추수감사절, 할로윈, 생일 등 다양한 기념일에 아이들에게 풍선을 주는 문화가 있었다. 서브프라임으로 인한 금융대란으로 세계 경기에 찬바람이 불던 그 시기, 마트에서 만난 풍선은 또한 번 어린 시절의 기억을 상기시켰다. 이국적인 풍선의 문양과 색깔은 그에게 꿈을 상상하게 만들었고, 그 꿈은 어느 정도는 아버지의 꿈이기도 했다. ‘아버지를 통해 봤던 기분이 좋아지는 풍선들은 모두 미국에서 온 것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며, 그는 풍선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 이경미 작가 인터뷰

고양이 이야기로 시작해 볼게요. 고양이가 사람보다 나은 점이 있다면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들은 참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많이 보잖아요. 그런데 고양이는 눈치를 안 봐요. 전 그래서 강아지보다 고양이를 더 좋아하죠. 강아지는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행동양식도 사람의 영향을 많이 받지만, 고양이는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건 홀로 고고한 아름다움을 유지해요. 아, 물론 인간에게 애교도 부리죠. 필요할 때만. 고양이의 태도에서 사회관계의 철학을 배운 적도 많아요. 이렇게 이기적인 동물인데도 사랑스러운 이유가 뭘까.


제 결론은 자아도취적 성향으로 인해 권력을 끌어가기 때문에 갑을관계가 존재한다면 고양이가 언제나 갑이 되고, 인간은 자연스럽게 집사가 되는 거예요. 물론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사회관계 속에서 내가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면 고양이에게 배울 점이 있다는 거죠. 매번 그럴 수만은 없고, 음… 가끔씩만.


여러 지역에서 살아보셨는데, 이 중 서울의 매력을 뭐라 할 수 있을까요?


대학을 다니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지하철 플랫폼에서 범람한 강물처럼 쏟아지던 인파와 높은 하이힐을 신고 어깨를 부딪히며 걸어가는 이들의 모습이었어요. 수많은 사람들의 감정과 사연이 하나로 뒤엉켜 생성되는 활기찬 이야기, 그게 서울에 대한 저의 첫인상이었죠.


고등학교 때까지 경주에서만 살았던 저는 처음에는 서울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때의 저를 강하게 만들어 준 건 지하철 2호선으로 등하교하며 매일같이 바라보던 한강의 풍경, 특히 야경, 더 정확히는 늦은 밤 하굣길에 지하철 창 너머로 한강을 바라보며 경험하는 명상의 시간이었죠. 창 너머로 보이는 한강과 형광등 불빛이 창에 반사되어 비치는 나의 모습, 그 사이 유리창으로 비치는 객실 한 칸에 나란히 들어앉은 익명의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며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표정. 그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전한 서울이라는 도시가 주는 거대한 구조적 선물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저는 홍대를 지날 때마다 느껴지는 문화적 생동감이 좋았어요. 하루에도 몇만 명의 유동인구가 오가는 분주한 거리 위로 젊은이들의 열기를 가장 가까이서 느낄 수 있는 곳이 홍대인 것 같았고, 그래서 서울을 더욱 사랑하게 됐죠. 그 좁고 활기찬 사람들과 에너지 사이 어딘가에 분명, 예술이 끼어들 틈이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예술가로 살아가며 비평이나 비판에 대한 두려움을 느낄 때가 있었나요?


뭐랄까. 실제와는 무관한 소문이 조금 있었어요. 저는 신인 때부터 운 좋게 이름을 알렸지만, 해외에 있었던 시간이 길어 국내 미술계와 동떨어진 채 10년가량을 보냈거든요. 그러면서도 계속 작품 활동을 하다 보니, 특별히 나쁜 소문이라기보다는 저를 직접 알지 못해 생기는 오해의 말들이 들려오곤 했는데, 제가 뒤러 시리즈를 하고 있을 때 그런 소문들이 극에 달했어요.


3년 반 동안 작업한 뒤러 시리즈를 한국으로 돌아와 발표하고자 할 때, ‘그래서 이 작품들을 어떻게 할 건데?’라는 반응도 많았죠. 그러다 세줄 갤러리를 통해 전시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저는 작품을 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좋았기에 반향을 일으킬 거라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평단은 저와 거리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상을 받는 건 기대도 안 했거든요.


그런데 정말 운 좋게 석주문화재단 심사위원단 분들의 블라인드 심사를 통해 수상을 하게 되었을 때 든 생각은, 나에 대해 들려오는 뜬소문들을 좀 더 신경 쓰지 말자는 거였어요. 평단이 필요 없는 게 아니라, 미술계로부터 오는 나의 이야기를 듣기는 하되 적어도 듣기만 하는 입장이 아닌 작가로서 반론을 펼칠 수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그들은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만 내 생각은 이렇다고 작품을 통해 보여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 건강하다는 거죠.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와 평론가들이 생각하는 부분에는 당연히 간극이 존재할 수밖에 없어요. 이를 굳이 좁히거나 잘 보이려고 애쓸 필요는 없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작가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의문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었죠.

현재 계획 중인 새로운 시리즈가 있나요?


독일은 연중 다후 지역으로 한 달 중 절반가량 비가 내려요. 때문에 한국의 겨울과 달리 독일의 겨울 숲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죠. 바닥을 가득 채운 이끼가 나뭇가지를 타고 올라가는 모습에선 우주로 뻗어나갈 듯 강인한 생명력이 느껴져요. 이처럼 풍요로운 독일 겨울 숲에 대한 이야기를 앞으로 보여드릴 계획이에요.

출처: 레전드매거진 2020년 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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