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에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다시 읽어야 하는 이유​

조회수 2017. 6. 24. 15:18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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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적 현안을 예리하게 응시했던 석학

※ 《기획회의》 편집위원회의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 서문입니다.


Zygmunt Bauman

우리 시대의 사회·문화적 현안들을 예리한 시선으로 응시했던 석학(碩學)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이 2017년 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다양한 학문적 관심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애정 깊은 통찰로 “유럽의 대표 지성”으로 불렸던 바우만은 생전에 한국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20권이 넘는 저서가 국내에 소개되었고, 2003년 《당대비평》과 2009년 《인디고잉》 등 국내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진행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2015년에는 70m 상공에서 굴뚝 농성을 벌인 쌍용차 해고자 김정욱·이창근 씨를 응원하는 “힘내라! 김정욱 이창근”이라는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바우만의 사상과 철학의 시공간적 배경은 항상 ‘지금, 여기’였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는 홀로코스트를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한시적 시간인 ‘그때’, 유대인이라는 ‘그들’에게만 일어난, 즉 오늘 우리와는 무관한 사건으로 여긴다. 이를테면 역사에서 “돌출적인 극단적 예외 상태”라고 믿고 싶은 것이다. 이런 이유로 어쩌면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바우만은 『현대성과 홀로코스트(Modernity and Holocaust)』(새물결, 201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홀로코스트는 우리의 합리적인 현대 사회에서, 우리 문명이 고도로 발전한 단계에서, 그리고 인류의 문화적 성취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태동해 실행되었으며, 바로 이 때문에 홀로코스트는 그러한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는 급속도로 변화·발전했다. 이제 세계는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정도가 아니라 1분 1초 사이에 뒤집힌다. “사회와 문명과 문화의 문제”라는 바우만의 지적은 결국 급변하는 사회·문명·문화 속에서 우리 시대도 홀로코스트가 재발할 수 있다는 일갈이다. 이런 이유로 바우만은 “아우슈비츠가 우리 사유의 원점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던 것이다.

바우만은 불평등 문제도 오랫동안 천착했다. 그는 『왜 우리는 불평등을 감수하는가?(Does The Richness Of The Benefit Us All?)』(동녘, 2013)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 바 있다.

생존과 만족스러운 삶에 필요한 물건들이 갈수록 희소해지고 손에 넣기 어려워지면서 생활이 넉넉한 사람들과 버림받은 빈자들 간의 살벌한 경쟁의 대상, 아니 전쟁의 대상이 되고 있기 때문에 현재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의 일차적 피해자는 민주주의가 될 것이다.

2016년 늦가을부터 2017년 5월 대선정국까지, 한국 사회는 바우만이 예견한 길을 그대로 따라갔다. 아무리 늦게 잡아도 1997년 IMF 외환위기 직후부터 공고해진 한국 사회의 신자유주의는 샐러리맨들의 평생직장만을 앗아가는 데 그치지 않았다.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사회의 포문을 열었고, 이내 한국인들은 제 살길 찾기에만 급급할 수밖에 없었다.


좁게는 정치, 넓게는 민주주의에 누구 하나 관심을 쏟지 않았다. 아니, 정치에 관심을 쏟을 만한 작은 여유조차 없이 살았다고 하는 게 옳다. 그사이 정치는 협잡(挾雜)의 다른 말이 되었다. 끝내 제 주머니만 채우고, 자기 사람들만 돕기에 바빴던 대통령을 보게 되었다. 불평등이 단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 정치와 우리 사회 전반의 후퇴, 즉 민주주의의 퇴보를 가져왔던 것이다.


“전 세계가 필사적으로 경제성장 근본주의를 밀고 나가고 있는데도, 빈곤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고 지속된다”는 바우만의 지적은 한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에게 화두이자 당면한 문제일 수밖에 없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은 ‘지금 여기’, 오늘 우리 시대를 통찰했던 바우만의 삶과 학문적 자취를 다시금 조명하고자 기획된 책이다. 폴란드 출신으로 영국에서 오랫동안 활동했던 한 사회학자의 학문적 천착이 한국 사회에 어떤 자취를 남겼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앞서 지적한 것처럼 저작 대부분이 국내에 소개되었고 적잖은 사회적 파동을 주었다는 점에서, 바우만의 다각도 조명은 곧 우리 사회의 좌표를 더듬는 일에 다름 아니다.


사실 바우만이 국내 독자들에게 사랑받은 가장 큰 이유는 현대인들의 일상과 사회 변화를 ‘콕’ 집어서 설명했기 때문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현대 사회에서 확실한 것, 불변하는 것은 그 무엇도 없다. 어제 새로웠던 것들은 이미 낡고 진부하다. 그 진부함으로 경쟁했다가는 낙오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바우만은 세상의 대열에서 낙오하지 않기 위해 사람들이 온갖 접속을 시도한다고 주장했다. 한풀 꺾였지만 트위터와 페이스북 열풍은 어딘가 소속된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하다. 온종일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지 않는 사람들, 마치 ‘카톡’ 소리가 울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답장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쉽사리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바우만은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44 Letters from the Liquid Modern World)』(동녘, 2012)에서 현대인들이 “가상적인 관계들이 현실적인 관계의 가장 실질적인 부분을 능가하는” 세계에 의존해 살고 있다고 진단한 바 있다. 그러나 가상적인 관계들은 삶을 윤택하게 하지 못한다. 성마른 인간을 더 만들어낼 뿐, 더 깊은 유대를 만들어내기에 기술과 문명은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은밀한 사적 영역까지 스스로 까발리며 접속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는 세태를 향해 “사적인 영역이 현존하는 권력에 의해서 과도한 간섭을 받지 않도록 방어하는 일”, 곧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일이야말로 “인간들 상호 간의 유대”와 공동생활을 위한 강력한 도구임을 그는 역설했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은 바우만의 다양한 저서를 통해 삶의 행적을 살펴본 작은 평전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바우만의 저서 각 권에 대한 꼼꼼한 서평이 이어진다. 국내에 출간된 바우만의 저서는 모두 26권으로 이 책에는 그중 19권의 서평을 실었다. 절판 혹은 품절된 책도 있었으며, 적절한 필자를 찾지 못한 탓이다.


서평의 필자로는 시인, 기자, 출판평론가, 역사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함께했다. 너른 필자의 폭은 결국 바우만의 사유와 철학이 그만큼 다채롭고 웅숭깊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울러 한동안 폴란드에서 학문 활동을 했고, 바우만과도 오랫동안 교분을 나눈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 사회학자이자 작가로 프랑스에서 활동하며 바우만의 학문적 자취를 공부한 정수복 선생, 그리고 바우만의 저작 중 『쓰레기가 되는 삶들(Wasted Lives)』(새물결, 2008), 『부수적 피해(Collateral Damage)』(민음사, 2013)와 주저(主著)라 할 수 있는 『현대성과 홀로코스트』를 번역한 정일준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의 좌담을 마련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사회학자의 발자취를 뒤쫓은 후학들의 좌담은 가히 이 책의 백미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책 말미에는 그의 사상과 철학을 예술적 관점에서 분석해 한국사회에 대비한 글과 김민웅 경희대 미래문명원 교수와 바우만이 나눈 가상 대담을 실었다. ‘바우만이 바라본 한국 사회’를 주제로 펼쳐지는 두 사람의 대담은 비록 가상이지만 바우만의 사상과 철학에 철저히 기반 두고 있으며, 그만큼 한국 사회를 예리하게 응시할 수 있도록 돕는다.

『지그문트 바우만을 읽는 시간』을 펴내는 이유는 바우만뿐 아니라 우리 시대를 밝힌 모든 인문 지성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그의 사상과 철학이 동시대인은 물론 모든 세대에게 오롯이 전해졌으면 한다. 그런 점에서 바우만의 저서를 제대로 읽어내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데 유익한 지침서라 할 수 있다.


단지 바우만의 사상과 철학을 재음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의 새로운 활력소가 될 활발한 공론의 장도 넓고 크게 열리기를 기대한다. 독자 여러분의 질정을 함께 부탁드린다.


원문: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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