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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초 에디터가 직접 쓰고 있는 안경, 애쉬크로포트 홀든 콜필드에 관한 글을 썼다. 이 글을 쓰고 나서 가장 많이 들었던 피드백은 ‘류노스케는 어디가고?‘였다. 류노스케. 애쉬크로프트의 시작이자 애쉬크로프트의 정수를 꼽자면 아마 이 ‘류노스케’ 안경을 꼽을 것이다.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에서 모티브를 딴 이 안경은 애쉬크로프트하면 류노스케가 따라올 정도로 애쉬크로프트 정체성을 드러내는 안경이며, 애쉬크로프트에서 가장 많이 팔린 제품이다. 큰 인기에 힘입어 다양한 버전이 등장한 이 안경. 애쉬크로프트의 류노스케는 과연 어떤 안경이기에 이렇게 큰 사랑을 받았던 것일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 龍之介)와 안경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 근대에 활동했던 소설가다. 그는 주로 고전 설화 등에서 소재를 가져와 각색한 단편 소설을 내놓았다. 전체적인 작품 분위기는 어둡고, 암울하며,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하고 이를 세세하게 톺는 데 주력한다. 말년에는 신경쇠약에 빠져, 결국 젊은 나이에 음독자살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런 그를 우상으로 바라봤던 인물이 <인간 실격> 등으로 유명한 다자이 오사무가 되겠다.
애쉬크로프트의 류노스케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는 인물과, 그가 집필한 작품을 해석하는 데서부터 출발했다. 애쉬크로프트가 느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그리고 그의 작품은 안경 곳곳에서 드러나지만 기본적인 테마는 ‘날카롭지만 공격적이지 않은‘이다. 그리고 이 의도를 담아 시리즈를 관통하는 특징은 안경 프레임의 발색이다.
류노스케 안경의 색은 기존 안경에서 볼 수 없던 독특한 색감을 갖췄다. 이른바 ‘워싱감‘이 살아있는데, 이는 기존의 안경과 전혀 다른 공정을 채택한 덕분이다. 먼저 프레임에 색을 입힌 후, 이걸 일일이 다시 긁어 데미지를 입힌 후, 그다음 다시 색을 덧대는 방식으로 일반적인 안경 공정에서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다. 대신 그만큼 독특한 질감이 살아있는 색상을 구현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색상을 통해 시리즈의 정체성을 확보하는 발상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신선한 방식이다. 하지만 그만큼 놀랍게도 눈을 사로잡는 방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등장한 류노스케 시리즈는 총 네 가지. 각기 독특한 개성을 띄는 안경의 면면을 살펴봤다.
Ryunosuke I, II
류노스케 시리즈를 열어젖힌 안경이자, 가장 기본적인 디자인. 류노스케다. 류노스케는 I과 II 총 두 가지 버전이 등장했는데, 이 둘의 차이는 크기. II 버전이 I 버전보다 약 3mm가 더 커졌다. 긴 시간 인기를 끈 만큼 색상의 종류도 다양하다. 류노스케 I이 11가지(Beetle Black, Washed Black, Chrome Silver, Gold & Silver, Gold & Brown, Antique Gold, Brass, Burgundy, Chestnut, Bronze, Rustic), 류노스케 II가 3가지(Kappa Brown, Kappa Grey, Kappa Black)로 총 14가지 색상이 있다.
워싱감이 살아있는 거친 느낌의 발색 덕분에 안경의 첫인상은 결코 순한 느낌은 아니다. 하지만 색을 걷어내고 프레임을 찬찬히 살펴보면 전혀 또 다른 느낌을 느낄 수 있다. 렌즈 프레임 상단은 완만하고, 아래는 갸름한 계란 형태의 프레임은 무던한 인상을 주며, 프레임과 프레임 사이를 잇는 브리지는 높이 달아 프레임의 곡선이 얼굴의 라인을 따라 흐르도록 하는 효과를 준다.
상반된 인상의 발색과 프레임은 애쉬크로프트가 발견한 류노스케의 ‘날카롭지만 공격적이지 않은’ 테마를 훌륭하게 풀어냈고, 기본 모델이 조금 작다고 느끼는 소비자를 위해 조금 크기를 키운 류노스케 II가 탄생하게 됐다.
Akutagawa
아쿠타가와(芥川)는 류노스케의 성이자 류노스케의 외가이기도 하다. 이는 그가 외가로 입적한 탓인데, 이 집안은 메이지 유신 전까지 막부 다실(茶室)을 관장하는 내력 있는 집안이었다고 한다. 류노스케가 외가에서 읽은 다양한 양서는 그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데 발판이 됐다 하겠다.
아쿠타가와는 오리지널 류노스케보다 크기가 줄어들어 전체적으로 정돈된 느낌을 준다. 또한, 프레임에서도 변화가 생겼다. 완만한 곡선에 각을 줘 전체적으로 사각형에 가까운 테가 됐다. 사각형의 프레임을 더했으나 이 사각형이 날카로운 각진 느낌이 아니라는 점 또한 주의 깊게 봐야 할 부분이다. 날카로운 느낌의 발색, 그리고 공격적이지 않은 부드러운 프레임의 조화는 아쿠타가와에서도 통용되는 테마다.
류노스케 시리즈와 같은 방식으로 색을 입혔으나, 4가지 색(Matt Black, Dark Nickel, Rustic Gold, Brass)은 조금 달라 소비자의 애를 태울 만하다. 류노스케의 감성을 그대로 담았으나, 원형의 테보다 사각형의 테를 찾는 사람에게 고지식한 느낌의 아쿠타가와는 훌륭한 선택지가 될 것이다.
Barbital
류노스케가 죽기 전 가장 마지막으로 먹은 것은 수면제다. 그중에서도 수많은 유명인을 영원한 잠의 세계로 보낸 악명 높은 수면제, 바르비탈(Barbital)이 그 주인공이다. 애쉬크로프트 바르비탈은 마치 알약의 모양을 형상화한 듯 완연하게 동그란 프레임이 눈에 들어오는 안경이다.
색상은 총 3가지(Washed Black, Red Brown, Rustic Gold)로 류노스케와, 아쿠타가와도 조금씩 겹치거나 빠지는 색상이다. 그러나 여전히 프레임에서 느껴지는 거친 워싱감은 류노스케 시리즈라는 것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듯하다.
앞서 아쿠타가와가 고지식한 느낌을 준다면, 바르비탈은 그보다 더 돌아가 클래식한 느낌을 강조한 안경이다. 완전한 원형 테두리는 안경의 원형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마저 든다. 원형은 방어적인 형태다. 구심점에서 주변으로 뻗어갈 수 있는 최대한을 유지한 형태가 원형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바르비탈은 류노스케의 문학이, 그리고 그가 주변 환경 속에서 취했던 방어적인 스탠스가 가장 오롯이 묻어나오는 안경이라 하겠다.
Bambu
애쉬크로프트에서 류노스케를 처음으로 출시한 직후부터, 지금까지 가장 많이 들었던 피드백 중 하나는 아마 ‘프레임이 너무 작다‘는 게 아닐까? 류노스케 I에 이어 크기를 더 키운 류노스케 II가 나왔지만, 여전히 프레임이 조금 더 컸으면 하는 피드백에 따라 렌즈 사이즈를 51mm까지 키운 모델이 바로 뱀부(Bambu) 모델이다.
가볍게 크기를 키운 것 같지만, 안경의 밸런스를 잡으면서 크기를 키우려면 설계를 완전히 다시 해야 하는 만큼 쉬운 시도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프레임에 대나무를 연상케 하는 독특한 디자인까지 반영했다. 대나무 마디를 재현한 패턴은 안경에 독특한 입체감을 부여한다. 그러면서도 테두리가 두껍지 않아 얼굴과 유리돼 보이지 않는다.
총 5가지 색상(Washed Black, Dark Nickel, Rustic Brass, Brass, Burgundy)은 류노스케 시리즈의 정체성을 담아낸 워싱감을 자랑한다. 지난 5월에야 첫선을 보인 뱀부. 독특한 테두리와 맞물린 묘한 질감은 여태껏 ‘더 큰 류노스케’를 찾아왔던 사람에게 희소식이 될 만하다.
브랜드를 위한 설득력 있는 움직임
세상엔 다양한 브랜드가 저마다의 이야기를 한다. 어떤 브랜드는 이야기를 짜 맞추는 데 급급한, 허공에 뜬 이야기를 내뱉고, 어떤 브랜드는 다른 데서 할 수 없는, 자신만의 이야기를 한다. 애쉬크로프트는 단연 후자에 속하는 브랜드라 하겠다.
다양한 디자인의 안경. 하지만 한 가지 잊어서는 안 될 사실이 있다. 바로 기본기다. 아무리 매력적인 디자인과 브랜드라도 안경의 기본기가 갖춰지지 않는다면, 디자인,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언어는 허공을 떠다닐 뿐이다. 그런 점에서 애쉬크로프트는 타협하지 않는 브랜드다. 애쉬크로프트라는 브랜드, 류노스케라는 제품의 독특한 발색을 위해 번거로움을 무릅쓰고 불편한 공정을 손수 처리했다. 애쉬크로프트가 자신을 ‘잔재주 피우지 않는 안경 브랜드‘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애쉬크로프트의 공정에선 어떤 ‘잔재주’도 볼 수 없다.
애쉬크로프트 류노스케 시리즈는 무엇을 선택하든 디자인과 브랜드 언어, 그리고 안경의 만듦새 모두가 조화로운 매력적인 안경이다. 애쉬크로프트 디자인에 반해 류노스케를 찾았다면, 이제 류노스케의 만듦새에 반할 일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