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아빠의 카톡을 보고 펑펑 운 딸의 사연

조회수 2019. 11. 15. 10:31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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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는 아빠의 카톡에 밤잠을 설치고 말았다

늦은 밤, 아빠가 난데없이 카톡을 보냈습니다. 언제 찍었는지도 모를 30년도 더 된 사진입니다. 레트로한 느낌의 저 빨강색 수영복은 어렴풋하게 기억이 납니다. 여동생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 양세형을 닮았습니다. 나는 아빠의 불현듯한 카톡에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하고 시답잖게 연예인 얘기나 하고 말았습니다. 


아빠는 왜 이 늦은 밤 저 사진을 보고 있었을까요. 성인이 되어 다 함께 찍은 가족사진도 있는데 말이죠. 3살인 동생과 5살의 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지난한 세월과 그 세월만큼 나이 들어 버린 자식이 서운해서일 겁니다. 한 달에 겨우 한두 번 인사치레로 건네는 전화 한 통이 전부인 자식들이 보고 싶어서일 겁니다. “아빠 어디야? 밥은 먹었어? 알겠어. 운전 조심한다니까.” 이 세 마디가 전부인 전화통화를 끝내는 데는 1분, 아니 30초도 걸리지 않습니다. 아빠를 그렇게나 좋아했던 딸은 무심하고 차가운 어른이 되었습니다. 그날 밤, 아빠와 함께 30년 전을 되새김질하느라 딸인 저 역시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빠는 택시 운전사입니다. 한평생 운전만 해서 다리가 ‘새다리’가 되었죠. 아빠의 얇은 다리가 눈에 들어온 건 직장인이 된 후였습니다. 자동차 페달을 밟을 때마다 저는 무럭무럭 자랐고, 그만큼 아빠의 종아리는 얇아졌을 겁니다.  

어렸을 때 아빠의 택시를 타고 달리는 걸 유독 좋아했습니다. 아빠는 늘 저를 조수석이 아니라 뒷자리 왼쪽 좌석에 태우셨죠. 사고가 났을 때 운전자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핸들은 반대편으로 꺾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절대 옆자리에는 앉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아빠와 나는 한적한 시골길을 주로 달렸고, 시골에 딱 하나뿐인 동네 슈퍼에서 ‘봉봉’과 같은 음료수를 즐겨 사 먹었습니다. 그러고는 지방 작은 도시에 하나뿐인 놀이공원에 가 사진도 찍고 장난감도 사주셨습니다. 지팡이처럼 생긴 긴 막대를 밀 때마다 나비의 날개가 ‘딱딱’ 하고 접히던 장난감은 지금도 기억이 납니다. 

제게 아빠는 애증의 대상입니다. 저는 아빠가 자식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딸들에게는 아빠가 있고 관계의 깊이가 다 다르겠지만 저는 썩 좋은 딸이라고, 아빠 역시 좋은 아빠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딸이 혼자 산 지 10년이 다 되었는데도 단 한번도 딸의 집을 궁금해하지 않은 아빠, 고작 명절에만 고향에 내려갈 뿐인데 그때마다 본인의 신세 한탄만 하는 아빠, 딸의 일이 고되지는 않는지 연애는 잘하고 있는지 허리디스크는 좀 괜찮아졌는지 묻지 않는 아빠, 그런 아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얼마 전 사진 속 제 나이만 한 딸과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아빠의 이야기를 담은 실화 ‘완벽한 날들’을 읽었습니다. 저자는 다발성경화증이라고 하는 병에 걸렸고,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문고리를 제대로 잡을 수도 없고, 매일 온몸에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을 느끼죠. 그리고 무엇보다 딸과 블록 쌓기 놀이를 해줄 수 없을 만큼 몸이 망가집니다.

이제 막 아장아장 걷기 시작한 딸과 그 딸이 자신과 같은 병에 걸리지 않게 해달라며 밤마다 울며 기도하는 남자는 더 늦기 전에 딸과 함께하는 여행을 결심합니다. 기차를 타고 달리며 꾸벅꾸벅 졸고 있는 딸에게 바깥 풍경을 보여주며 “구름은 수증기가 증발해서 만들어지는 거야”라며 너무 어려 알아듣지도 못할 말들을 건넵니다. 아빠는 조급했거든요. 이 모든 것들을 딸과 나눌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까 봐요. 그는 매일매일 언제 끝날지 모를 삶을 붙잡으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그리고 남자는 딸이 태어나면 해보고 싶었던 버킷리스트를 하나씩 해나갑니다. 매일 밤 목욕시키기, 주말 아침마다 블록 쌓기 놀이하기, 기차여행하기 등. 하지만 남자의 병세는 점점 악화되기만 합니다. 어느 날 아침에 문득 눈을 떴을 때, 앞이 보이지 않았죠. 남자는 딸의 반짝이는 눈빛을 보지 못할까 봐, 딸의 작은 숨결을 더 이상 느끼지 못할까 봐 너무나 두려워집니다.  


‘자신의 삶이 끝나는 것보다 딸의 삶을 더 이상 지켜보지 못할까 봐’ 두려웠던 남자의 이야기는 문득 어두운 밤 다 큰 딸에게 카톡을 보낸 아빠의 마음을 헤아리게 합니다. 그리고 시간을 30년 전으로 되돌려 그때 마셨던 포도 주스의 맛과 택시를 타고 달리며 맞았던 바람을 다시 느끼게 합니다. 지금은 단 둘이 밥을 먹으면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만 들릴 정도로 어색한 사이가 됐지만 우리에게도 애틋한 시간이 있었다는 걸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추억할 수 있는 무언가가 조금 멀어진 부녀 사이를 이어주고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빠가 그밤 카톡으로 사진을 보내지 않았다면 저는 아빠가 자식은 안중에도 없는 부모라고 여전히 오해했을지 모릅니다. 그날 아빠는 딸과 함께 추억을 공유하고 싶었나 봅니다. 용기 내어 준 아빠가 내심 고맙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빠가 내 옆에 건강하게 있어줘서 또 고맙습니다. 


■ 위의 리뷰는 '완벽한 날들'을 직접 읽고 쓴 독자의 실제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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