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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은 이렇게 다르다

조회수 2020. 7. 10. 17:20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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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은 자국이 저지른 반문명적인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역사적 공간을 복원하여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켰을 때 수용소에는 7,500명만이 남아 있었다.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정문. '노동이 그대를 자유케 하리라'는 글귀가 걸려 있다.

1945년 1월 27일, 소련의 붉은 군대는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던 7천 5백여 명의 유태인들을 해방시켰다. 소련군이 진격해 오던 1월 중순부터 나치 친위대(SS)는 남아 있던 가스 학살 장치를 파괴하고 아우슈비츠에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각 전선에서 독일군이 무너지면서 전쟁은 끝나 가고 있었고 연합군은 수복한 지역의 집단수용소를 폐쇄하고 있었다. 독일군은 전선 부근의 캠프에 있던 수감자들을 독일 내의 수용소에서 강제로 노역시키기 위해 급박하게 옮기기 시작했다.


수감자들은 처음엔 기차로, 나중엔 먼 거리를 강제로 도보로 행군해야 했다. 날씨는 혹독했고 음식과 물, 휴식도 거의 주어지지 않았다. ‘죽음의 행진’이었다. 마지막 죽음의 행진은 소련군이 폴란드를 해방하기 시작할 시점인 1944년과 1945년 겨울에 시행되었다.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해방


소련군이 아우슈비츠에 도달하기 9일 전, 독일군은 수용소에 있던 6만 명의 수감자들을 35마일 떨어진 보드치슬로(Wodzislaw)라는 마을로 행진시켜서 그곳에서 화물열차에 태워서 다른 수용소로 보냈다. 이 과정에서 네 명에 한 명꼴로 목숨을 잃었다.

전쟁 전의 독일계 유태인 두 가족. 이 가운데 단 두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수천 명은 죽음의 행진이 있기 며칠 전에 학살되었다. 유태인이 대부분인 수만 명의 수감자들이 북부 실레지아 서부의 우지슬라우로 행진하도록 내몰렸다. SS 경비대는 대열에서 처지거나 행군이 어려운 사람들은 사살했다. 아우슈비츠에서 출발한 죽음의 행진에서 1만 5천 명 이상이 사망했다.


우지슬라우에 도착한 수감자들은 난방 시설도 없는 기차에 실려서 독일의 집단 수용소로 수송되었다. 그래서 아우슈비츠로 진군한 소련군이 해방시킨 수감자들은 7천 5백 명, 전체 수감자 가운데 1/10을 조금 넘었던 것이다.


나치 독일은 1933년부터 1945년까지 수백만 명을 수감하기 위하여 약 2만 개소의 수용소를 건설하였다. 수용소들은 강제 노동 수용소, 임시 수용소, 대량학살을 목적으로 지어진 수용소 등 여러 목적으로 건설되고 운용되었다.


나치 정권은 1933년부터 이른바 ‘제국의 적들’을 감금하고 제거하기 위한 일련의 수용 시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들 수용소는 집단수용소라 불리었는데 초기 집단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들은 대부분이 독일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사회 민주주의자, 로마니(집시), 여호와의 증인, 동성애자 그리고 ‘반사회적’ 인물로 낙인찍히거나 반사회적 행동을 한 사람들이었다.


1938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합병 뒤, 나치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유태인을 체포하여 독일에 있는 다하우, 부헨발트, 작센하우젠 집단 수용소로 이송하였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독일계 유대인 청년이 파리 주재 독일 대사관의 서기관을 암살한 사건에 대한 보복으로 일어난 대규모 유태인 박해 사건) 이후, 나치는 남자 유태인을 대량 체포하여 단기간 동안 집단 수용소에 감금하였다.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 이후, 나치는 강제 노동 수용소를 운영하기 시작했는데 여기서 수천 명의 수용자들이 피로와 기아, 일사병으로 사망하였다. 수용소 경비는 친위대가 맡았다. 제 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나치 수용소 시스템은 매우 빠르게 확산되었다. 

유태인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자행된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 비르케나우의 정문
공중에서 촬영한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의 막사들
1945년 1월 27일 소련 적군이 아우슈비츠를 해방시켰을 때의 수용소 생존자들의 모습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 후, 나치는 전쟁 포로수용소를 늘렸다. 일부 새로운 수용소는 아우슈비츠 같은 폴란드 점령 지역의 기존 집단 수용소 부지에 세워졌다. 전쟁 포로수용소에 수용된 수천 명의 전쟁포로들은 여기서 총살되거나 가스로 죽음을 맞았다.



나치의 대학살, 홀로코스트


‘최종 해결’(민족말살 또는 유태인의 대량 학살)을 촉진하기 위하여 나치는 유태인 인구가 가장 많은 나라인 폴란드에 집단 학살 수용소를 설립하였다. 집단 학살 수용소는 대량 학살을 효과적으로 진행하기 위하여 고안되었다.


1941년 12월에 처음 문을 연 헤움노(Chelmno) 수용소가 최초의 집단 학살 수용소였다. 유태인과 집시는 이 수용소의 이동식 가스차 안에서 학살당하였다. 나치는 학살을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학살 집행자가 죄책감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가스실을 건설하였다.


가스실은 실내에 있는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독가스가 분사되는 방인데 아우슈비츠 수용소 내 비르케나우 집단 학살장에는 4개의 가스실이 운용되었다. 수용소로 수송되는 건수가 최고조에 달하는 때에는 하루에 6천 명가량의 유태인이 가스로 학살되었다.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여러 종류의 나치 수용소에 감금되어 학대를 받았다. 친위대의 주관 아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은 집단 학살 수용소에서만 3백만 명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하였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비율은 매우 낮았다.


1940년 5월에 건설되기 시작한 아우슈비츠 집단 수용소는 나치가 건설한 수용소 중 가장 규모가 컸다. 폴란드 오시비엥침 시의 교외에 세워진 수용소는 나중에 독일어인 ‘아우슈비츠’로 바뀌었다. 아우슈비츠에는 세 군데의 주요 수용소가 있었는데, 가장 오래된 첫 번째 구역은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고, 두 번째 구역은 아우슈비츠 제2수용소로 알려진 비르케나우 수용소다.


9만 명 이상을 수용한 비르케나우 수용소에는 대량 학살 장비들이 설치되었고, 희생자의 대다수가 이곳에서 숨졌다. 비르케나우 곳곳에는 지금도 인체를 소각하고 남은 재로 가득하며, 아우슈비츠 유적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수용소의 유일한 목적은 인간 말살이었다.


히틀러의 유대인 말살 계획의 하나로 유럽 지역 유대인들에게 자행되었던 역사상 최대 규모의 대학살은 1942년부터 벌어졌다.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유대인 성인 남녀와 어린이들의 과반수가 수용소에 도착하자마자 비르케나우의 가스실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1942년과 1944년 사이에 아우슈비츠는 유태인들이 고문당하고 살해당했던 대량 학살 수용소였다. 친위대와 독일 경찰은 1940년에서 1945년까지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수송한 것으로 추정되는 130만 명이 넘는 수용자 가운데 약 110만 명을 학살하였다.


강제수용소에서 학살에 관여한 나치 전범들. 왼쪽부터 아이히만, 괴벨스, 힘러, 하이드리히, 멩겔레

아우슈비츠에서 해방된 수감자들 중 180명은 어린이들이었고 이 중 52명은 8세 이하였다. 이 아이들이 지옥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나치가 시행한 의학 실험을 위해 쥐나 토끼 대신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수용소가 운영되는 기간 동안, 아우슈비츠의 많은 어린이들이 나치 의사인 요제프 멩겔레(Josef Mengele)의 의학 실험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나치 친위대는 자신들이 저지른 범행의 흔적을 없애기 위해 가스실, 소각장, 다른 건물들을 허물어 없애고 관련 문서들을 소각하기 시작했다. 행군이 가능한 수용자들은 독일로 후송되었다. 수용소에 남겨진 이들은 소련의 적군(赤軍)에 의해 해방되었으나 이들은 대부분 아프거나 죽어가는 상태였다.


전쟁이 끝난 뒤, 1947년 폴란드는 의회법을 통해 남아 있는 아우슈비츠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비르케나우)의 지대 위에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박물관을 설립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는 1979년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데 유네스코는 그 지정 이유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는 나치 독일(1933~1945)이 계획적으로 유대인과 수많은 사람들을 집단 학살한 증거이며, 인간성에 반하여 자행된 범죄 행위의 부정할 수 없는 증거이다. 이 수용소는 자유로운 행동과 사상을 억압하고 한 민족 전체를 말살하려고 했던 나치 독일의 시도에 끔찍한 역경 속에서도 끝까지 저항했던 강한 인간 정신을 기념한다.


이 유적은 유대인 대학살, 인종차별 정책, 인간의 야만성을 전 인류에게 상기시키는 주요 장소이다. 또한 인류 역사의 어두운 한때에 관한 기억이 모여 다음 세대로 전달되는 곳이자, 과격한 사상이나 인간 존엄성 부정이 가져올 수많은 위협과 비극에 대한 경고의 장이기도 하다.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누리집에서
1945년의 다하우 수용소. 다하우는 독일 안에서 가장 먼저 세워진 수용소다.
과거를 잊지 않기 위해 복원된 다하우 수용소와 상징 조형물. 박물관도 운영하고 있다.

아우슈비츠 박물관은 폴란드 영토 안에 있어 폴란드에서 운영한다. 그러나 독일 영토 안에서 세워진 최초의 수용소인 다하우(Dachau) 강제수용소도 나치의 만행을 알리고 끝나지 않은 역사를 반성하자는 뜻에서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어 있다.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의 차이


독일은 자국이 저지른 반문명적인 학살의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이런 역사적 공간을 복원하여 박물관이나 기념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일본이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적 사실을 가리고 ‘메이지 일본의 산업혁명 유산’ 23곳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한 것과 비겨지는 대목이다.


일찍이 독일은 2000년에 설립한 ‘기억·책임·미래 재단(EVZ)’을 통해 2차 대전 시기 나치 수용소 등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했던 약 4,000만 명의 피해자들 중 생존해 있는 170만 명에게 배상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시민들에 의해서 추진되는 ‘발부리 아래의 돌’ 프로젝트도 감동적인 사례다.


나치에 끌려가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그가 살던 집 길가 보도블록에 금속판을 박는 것이다. 정사각형 금속판에는 희생된 사람의 이름과 나이, 어디로 끌려가서 어떻게 희생됐는지 등 그의 일생이 간략히 기록돼 있다고 한다. 

1970년 당시 독일 총리 브란트는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 희생자기념비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일본 집권 자민당은 위안부 소녀상의 철거를 한국 측에 요구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경찰이 혹한 속에서 소녀상을 지키기 노숙농성을 계속하고 있는 젊은이들을 집시법 위반으로 수사하고 있다.

이 일그러진 풍경이 전범국가 독일과 일본의 차이고, 또 한편으론 과거 역사를 청산하는 방식에서 갈리는 독일과 한국의 민낯이다. 무엇보다도 당사자를 철저하게 소외시킨 불평등 위안부 협상에는 희생자에 대한 공감과 아픔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걸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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